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겨울이다. 거리에 나서보면 녹음의 물결로 초록의 바다를 연상케 했던 여름날의 무성함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장식되었던 수목들은 상록수를 제외하고는 겨울나무가 되어 알몸의 상태로 찬바람을 맞고 있다. 둥치로부터 한 잎 두 잎 떨어진 나뭇잎들은 완전한 귀거(歸去)를 못한 채 산야와 거리 위에 수북이 쌓이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는 낙엽의 높이도 양도 많아진다. 푸른 하늘 위를 무심히 떠도는 구름을 바라보며 낙엽 위를 걸어본다. 목숨이 다한 줄 알았던 낙엽이 바삭 바삭 소리를 낸다. 바람소리가 아니라 낙엽소리이다.

낙엽! 생(生)에서 사(死)로, 유(有)에서 무(無)로의 변화이다,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겨울에 죽어 있던 나뭇잎은 봄이 되면 새싹으로 부활하고 여름이면 진초록의 옷으로 단장하며 가을에는 빨강, 노랑, 갈색 등의 단풍으로 물들었다가 늦가을이 되면 땅위로 조락하고 바람에 실려 허공을 맴돌다가 겨울이 되면 눈(雪)을 이불 삼아 깊이 잠들어 버리는 과정을 밟고 있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정(From the ground, you will return)이지 않는가. 봄이 되면 창조되고 여름(청년)이 되면 우거지며 가을이 되면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겨울이 되면 나목(裸木)이 된 뒤 종국에 가서는 나무(자연계:세상)와 하직하지 않는가. 탄생, 성장, 결실, 회귀(回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렇듯 인간의 한 평생과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단 말인가.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들 속에서 빨갛게 물들어 있는 단풍(丹楓) 한 잎을 집어본다. 그리고는 나뭇잎이 가지로부터 떨어질 때나 상태를 가상하여 떠 올려 본다. 건강한 나뭇잎들은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흔들어대도 나무 가지에 매달린 채 좀처럼 지상위로 낙하하지 않는다. 아직 나무와 이별할 준비가 아니 되었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열정을 모두 바쳐 빨강이나, 노랑, 갈색 등으로 완벽하게 물들고 나서야, 나무둥치나 가지의 손을 놓는 것이다. 단풍으로 재탄생되어 자기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난 다음에야 나무와의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낙엽은 엽심(葉心)과 관계없이 가수들의 사모곡이 되고 시인들의 연인이 되며 화가들의 풍경이 되고 철학자들의 지혜의 창이 된다. 이렇듯 낙엽은 단풍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나무로부터 독립하고 만인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 낙엽처럼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승(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떠나야 하는가. 바꾸어 말하면 떠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한단 말인가. 낙엽은 말한다. 한 마디로 단풍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열을 다해 자신을 연소시켜 단풍으로 재탄생 내지 산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낙엽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인간은 오로지 한번만 살 수 있는 일회성(一回性) 및 일정 기간만 살 수 있는 한시성(限時性)의 존재이다. 논어 순명편(順命篇)에 제시된 말대로 이미 정해진 길(삶과 수명)을 가는 이정(已定)의 존재이다. 나서 성장하다 늙은 뒤 사라지는 생장노사(生長老死)의 존재이다. 허무하고(허허:虛虛) 부질없지만(공자망:空自忙) 피할 수 없는 필연의 길이다. 그 길 위를 가는 나그네이다. 특정의 소속도 고향도 없는 무적자(無籍者)이다.

낙엽은 색깔의 존재이다. 죽어 있지만 단풍으로 재생하고 있다. 단풍의 과정을 통해 불멸, 영원의 길을 간다. 단풍으로 산화할 수 있는 일생이다. 빨갛게 노랗게, 그리고 갈색 등으로 짙게 물들 수 있는 단풍, 정열을 모두 쏟고 고유하고 짙은 색깔로 자신을 완성하고 낙엽이 되어 바람과 함께 표표히 떠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명진사회(名振社會), 호사유피(虎死留皮) 등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 보다는 세상사에 구속되지 말고 자연이 되어 단풍처럼 자신을 연소시켜 최상의 빛깔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정열적인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 맡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단풍처럼 곱고 짙은 색깔로 물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권하는 삶의 방식이다. 단풍처럼 물들 수 있는 세월이 있어야 낙엽처럼 나무로부터 표표히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거리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낙엽을 만나 낙엽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인생과 비교하여 관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할까를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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