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아야 천년의 소리 나는 법

달궈진 쇳물을 원형틀에 붓고 있다.

(동양일보) 종(鐘) 속으로, 판화의 풍경속으로 떠나는 여행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철공방에만 가면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쇳물을 녹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붉게 빛나는 얼굴에, 주름진 목젖에 검게 그을린 팔뚝과 유리알 같은 땀방울이 솟구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팔촌형은 할아버지를 빼닮았다. 손짓 발질 몸짓도 그러하고 눈빛까지 똑같았으니 종을 만드는 것은 우리 집안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다. 떠나고 싶었다. 그 틈새를 기웃거렸지만 이곳을 탈출하면 무슨 큰 죄라도 짓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팔촌형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종 만드는 일을 배웠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종을 만드는 기술도 늘지 않았다. 기술의 완성도는 종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종소리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종과 종메가 어울려야 온전한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래서 종메는 깊은 산속의 수백 년 된 소나무 중에서 곧게 뻗고 속이 깊은 것을 골라 잘 말리고 다듬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상처하나 없어야 했다. 종과 종메가 부딪히면 온몸이 으깨지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와 용기와 슬기로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때묻지 않은 대자연의 소리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인고의 세월 속에 숱한 풍랑을 겪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것이어야만 했다.

강한 에어와 ‘규사’를 이용해 범종을 완성하고 있다.
강한 에어와 ‘규사’를 이용해 범종을 완성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종메라 할지라도 천 년의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장인의 혼과 열정과 땀과 기예가 담기지 않으면 뛰어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다 건너 일본도 가보고 중국으로 달려가 보았다. 세상의 종이란 종은 다 만나보고 그 형태와 디자인과 구석구석의 숨은 비밀을 찾고자 했다. 세상의 범종 중에서 으뜸이라 하는 통일신라 종의 심연의 소리를 담기 위해서다.

통일신라 종은 무늬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리가 맑고 은은하며 향기까지 끼쳐온다. 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향기를 만드는 것은 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화룡정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애써도, 피를 토하며 온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담아도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후회막급이다. 종을 만드는 일이 이토록 힘든 노정이었으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에 운명같은 것은 없다고 했는데, 이 일에 집착하고 애정을 가졌던 그간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밤잠을 설치고 아침햇살 쏟아지기가 무섭게 공방으로 갔다. 천근만근이었다. 혼미한 상태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쇳물을 붓는 순간 뜨거운 쇳물이 오른쪽 눈에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뜨겁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꾸라졌고 의식을 잃었다. 한 쪽 눈은 영영 앞을 볼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한 쪽 눈이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짧지만 긴 방황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최고의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오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좋은 종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하니 내 몸과 마음이 더욱 단단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철장.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철장.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 선생은 이렇게 해서 신라의 상원사 종, 선림원 종, 흥덕사 출토 범종과 고려의 내소사 종을 재현했다. 일본 시마네현 광명사 보물창고에 수장돼 있던 9세 통일신라 종을 처음으로 복원했다. 보신각 종,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조계사 종, 낙산사 동종…. 그가 재현하거나 복원한 종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잡음이 섞이지 않는 맑은 소리, 골과 마루의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지고 멀리 퍼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퍼지는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과 은은한 향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하게 파도치곤 했다.

진천읍 장관리 백곡저수지 아래에 자리잡은 종박물관. 건물 자체가 종의 이미지를 닮아 흥미롭다. 이곳에는 선덕대왕 신종을 비롯해 150여 개 범종을 소개하고 있다. 범종의 역사와 특징, 제작과정 등을 다양한 자료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원 씨가 기증한 보물급 복원 범종도 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내 마음속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낮고 느리고 오래가는 맑은 소리다. 나를 깨우는 소리다. 바로 뒤에는 주철장전수교육관이 있으니 보고 배우고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종박물관과 이웃하고 있는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문을 살짝 열어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판화전문 미술관이다. 숲과 나무, 들과 길, 바다와 호수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애틋하고 정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는 판화가 김준권 씨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생긴 미술관이다. 때마침 ‘복을 주는 판화, 세화판화전’이 열리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 복이라도 잔뜩 받아가야겠다.

백곡저수지 댐의 위용 속에 자리잡은 박물관과 미술관과 전수관이 오달지다. 주변의 호수와 숲도 마뜩하다. 잠시 머무르니 역사의 풍경소리 끼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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