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 생로병사는 늘 주위에 있어왔지만, 12월이 되고 보니 주변 사람들의 변화가 더 크게 실감이 난다.

일요일엔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젊은이의 결혼식에 참석해 박수를 보내고 와서 오후엔 수술을 한 친구를 찾아 병문안을 했다. 육아휴직중인 동료가 아기를 안고 사무실을 찾아와 반가워 했던 그제는 건강검진에서 갑자기 암이 발견돼 입원을 한 지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어제는 동인이었던 시인의 고향에 가서 생가터 표지비를 세운 뒤, 후배의 모친상 상가를 다녀왔다. 매일매일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이 교차되면서 감정은 롤러코스트를 타듯 한다. 그러나 단 하루도 같은 소식은 없다. 이것이 삶이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어느새 노년에 가까워지는 나이가 됐다.

노년이 된다는 자각은 생각과 행동을 위축시킨다.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건강은 받쳐줄 것인가. 몸담았던 단체들에서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의 삶이 유한하며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시니컬해진다.

그런데 한 소소한 모임엘 다녀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시니어가 꽤 있는 그 모임에서 시니어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더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県)에서 만났던 여성단체 회원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오래 전 국제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충북여성포럼 회원들과 일본 야마나시현을 방문했었다. 현청장(県廳長)을 접견해 여성정책을 듣고, 도쿄와 야마나시 현의 여성시설을 돌아본 뒤 일본 여성단체 회원들과 토론을 갖는 프로그램이었다.

서로의 이해를 넓히고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야마나시현 고후시(甲府市)에 있는 여성단체 회원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그들의 후의로 나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홈스테이 할 집을 나눴다. 나와 J교수를 데려간 회원은 오랫동안 지역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60대 후반의 전직 기자였다. 그녀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밀레미술관을 돌아보고, 다도회에 참가하고, 딸 손녀 등 3대와 만나 외식도 하면서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여성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간 다른 회원들도 대개 이런 식으로 홈스테이를 하면서 교류를 한 뒤 한·일 회원 전체 모임을 가졌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 측 여성들이 40,50대가 주축이었다면, 일본 여성들은 60,70대가 주축이었다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내게 홈스테이를 제공해준 전직 여기자가 말했다. 자신의 경우 40,50대는 직업을 갖고 일을 해야할 시기였기 때문에 사회단체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직을 한 뒤에야 비로소 여성단체에 가입해서 활동 중이다. 아마 다른 회원들도 그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한 후 비로소 제2의 인생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할 일들을 찾아서 하고 있다. 그때 크게 느꼈었다. 은퇴를 하면 그대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사회공헌할 일을 찾아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구나. 시니어의 삶을 인생 2모작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진정한 2모작이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잊고 살았다.

서양에선 인생을 4단계로 나눌때 ①퍼스트에이지(First Age)=배움의 단계, ②세컨드에이지(Second Age)=배움을 통해 사회적 정착을 하는 단계 ③서드에이지(Third Age)=40세 이후 30년 동안 인생의 2차 성장을 통해 자아실현을 추구해가는 단계, ④포스에이지(Fourth Age)=노화의 시기로, 성공적인 삶을 이룩하고 젊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단계로 나눈다.

미국학자 윌리엄 새들러(William Sadler)는 은퇴 이후 30년의 삶이 새롭게 발견되는 ‘서드에이지’를 ‘뜨거운 나이(Hot Age)’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는 인생의 방향을 수정하는 시기란 것이다. 결국 모든 노년은 자기가 준비한 만큼 사는 것.

12월의 아침, ‘부지런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는 서양의 격언을 떠올리며 뜨거운 나이(Hot Age)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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