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교육제도의 개정의 기초 작업

●예술의 진흥과 사회 교화

▷야마가미 “1921년 정무총감으로부터 조선 예술에 대한 부흥 안을 작성하라는 명을 받고, ① 조선 정악강습소(正樂講習所) 보조 ② 미술·음악협회 설립 ③ 미술·음악학교 설립에 관한 안건을 내어 이를 예산화하려 했습니다만, 우선 당장 거액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교적 손쉬운 방법을 택해 시작해 보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에 와다 참사관 등을 참가시켜 미술전람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심사원으로서는 미술 학교장과의 연락을 통해 가와이(川合玉堂), 오카다(岡田三郞助) 양씨를 초빙하여 1922년 6월 1일부터 30일간 상품진열관(당시의 전매국)에서 개최했습니다. 이것이 조선 미술전람회의 시초입니다. 동양화를 제 1부(주임 가와이씨), 서양화와 조각을 제 2부(주임 오카다씨), 서예를 제 3부(주임 이완용 후작)로 분류하여 심사했는데, 감사(鑑査)를 받은 사람 수는 총 290명, 감사를 받은 작품 수는 403점이었고, 입선자 수는 168명(그 중 51명이 조선인) 입선작품 수는 215점(그 중 조선인 작품이 62점)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출품된 작품의 수준은 대체적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조선 화가, 문인의 작품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게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획이 과거 신라·고려시대의 예술의 생명을 부활시키고, 나아가 신 동양 미술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출발한 것은 물론이지만, 우선 당장 조선조의 비정(秕政)과 최근의 소요(3·1운동)로 인해 거칠대로 거칠어진 민심을 유화시키고, 한길 춘풍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일찍이 극단적으로 이반·반발(離反·反撥)했던 일본 조선인(內鮮人)이 한마음이 되어 신조선의 미술을 감상하는 광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계시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회기 중 6월 12일에 카토도모사브로(加藤友三郞) 남작의 내각이 성립되자, 미즈노 정무총감이 내무대신으로 영전하시게 되었고, 효고(兵庫)현 지사 아리요시다다카즈(有吉忠一1873.6.2.~1947.2.10)씨가 그 뒤를 잇게 됨으로써, 사이토 통치 제 1기의 막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3년 전 남대문 역두에서 폭탄세례 환영을 받고 새 동포들이 옛 모습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신 미술 경연에 도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놓고 귀국하시게 되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쾌재의 극치였다고 생각됩니다. 교육제도의 혁신 방안으로써 교육기관의 확충·증설계획이 수립되고, 경성제국대학 설립을 위한 창설위원을 선정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일반민중의 사회교과에 대해서는 도저히 손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학무국에 들어간 당초부터 저는 적어도 신정의 취지 및 제국민(帝國民)으로서의 상식을 조선 민중에게 철저히 보급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교화가 급선무라는 것을 믿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사회교화에 관한 양서(良書)가 없었으므로, 실제로 이를 행동에 옮기려 하는 실천가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교육령 개정의 급무를 처리하는 한편, 없는 시간을 쪼개어 사회교화 이론 및 시설 방안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8월 17일 원고 작성에 들어갔고, 다음 해 1922년 7월 27일에 탈고하여 <민중의 교화>라는 명제로 출판했습니다. 처음부터 불완전한 책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사회교화의 지도 원리를 터득함으로써 점점 능통할 수 있었고, 부족하나마 한 권의 책을 통해 실제적 시설 방법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알릴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재정도 민력(民力) 관계상 순조롭지 못했고, 학교의 증설 문제도 그렇게 쉽사리 뜻한 바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대(聖代) 문하의 평등한 이익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시바다 학무국장이 저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일 먼저 총독부 도서관을 설립해 주셨는데, 이를 통해 사회교화 장려의 시범을 보여주셨던 바, 제 기억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으로 살아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문화의 기초 작업은 수립되었고, 다나카 시학관은 이미 외유(外遊)의 길에 올랐으며, 저 또한 모리야씨가 외유하여 자리를 비운 곳을 계승하여 총독 비서관 및 참사관으로 10월에 전보 명령을 받았습니다. 시바다 국장은 10월 중순 일본의 미애(三重)현 지사로 영전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교육의 획기적 대혁신을 완성한 후, 의기양양하게 일본 관계(官界)로 다시 돌아가 맹활약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미즈노 “교육령의 제정과 교육시설에 대해서는 바로 지금 마츠무라군이 말한 바대로 입니. 당시는 만세소동(3·1운동) 직후로 인심이 흉흉하여 오직 치안유지가 급무였습니다만, 결코 경찰 만능주의가 최종목적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경찰정치로 만족할 저도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민심의 안정을 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 산업에서의 발전을 꾀하고자 유의하면서, 소위 문화적 시정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교육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당시 학무국장인 시바다 젠사브로씨를 비롯하여 학무 당국에 대해 기초조사를 명했는데, 국장 이하 각 관계자들 모두가 노력을 경주하여 이 일을 맡아 주었습니다. 단시일 내에 모든 관계 법령의 개폐를 완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분투노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경찰당국이 만세 소동의 뒤를 이어 치안유지에 노력했던 고충과 똑같은 괴로움을 겪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매우 감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교육시설이 경무 당국의 사업 실적과 비교해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질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조선통치 상 매우 중요한 성질의 사업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 내에서는 향학심이 크게 발흥했고, 교육시설을 완성하여 일본과 동일한 제도의 수준으로까지 올리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문화정도의 차이도 있고, 경제 상 부담 능력도 달랐기 때문에 즉시 동일 연한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 상태대로 방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일본과 동일한 제도 수준에까지 바꾸어 간다는 방침을 세우고 우선 보통학교 설립기준이 6면 1교로 되어 있던 것을 3면 1교로, 고등보통학교도 전 조선에 걸쳐 겨우 4,5교에 지나지 않던 것을 1도 1교의 방침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일본 학교와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일본학교와의 연계가 가능한 방향으로 개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에 있는 유력한 교육가들이 조선으로 건너오기를 요청하여 교육조사위원회를 설치했고, 일본 조선인(內鮮人)이 협력하여 연구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일부 식자들 간에는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다. 교육의 진흥은 오히려 조선인의 독립심을 함양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논의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우둔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는 결코 진정한 정치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교육의 내용에 특별한 의지를 세우고, 새 동포에게 가장 적절한 교육을 베푸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일시동인의 성지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착착 이 개혁안을 기획했고, 오직 견실하고 온전한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주력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반 조선인은 당국의 성의를 높이 평가하며 납득했고, 교육시설의 완성을 환영했습니다.”



●경성대학 설립의 배경

▷야마가미 “조선에 관립대학을 설립하셨던 것은 상당한 탁견(卓見)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관립대학에 있어서는 당시 가부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많았었다고 들었는데, 이를 단행하시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즈노 “조선에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에 대해 당시 조야(朝野) 간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에게는 가능한 한 교육을 실시하지 않아야 하고, 특히 고등교육에 있어서는 더욱 더 불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지(論旨)에 근거를 둔 대학 반대론은 상당히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내 소신은 백성을 우둔하게 해서 다스리는 정치는 결코 일본제국의 조선통치책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며, 또한 현명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사정을 보면 관립 고등교육기관은 겨우 전문학교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해 미국선교사는 경성이나 평양 등 각지에서 대학이라는 명칭 하에 전문교육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 다수가 여기에 입학을 희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대학의 교육내용은 매우 불온한 것이었습니다만, 개중에는 캠퍼스가 도쿄(東京)나 교토(京都)에 있는 제국대학에 비추어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대규모의 시설도 있었습니다. 외국인들 중에는 왕왕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교육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 인구 2000만이나 되는 조선에 대학 하나도 세우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비난과는 관계없이 나는 반드시 대학설립이 조선통치 상 필요하다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호즈미진즈우(穗積陣重) 박사와 만났을 때 “교육은 정치의 대본입니다. 독일이 알사스로렌을 빼앗았을 때 우선 제일 먼저 그곳에 대학을 설립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고, 과연 독일의 정치는 문명적이라고 높이 평가되었다는 일화를 비추어 보더라도 조선에도 반드시 대학을 하나 정도는 세워야 명분이 서지 않겠느냐?”고 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저도 이 의견에 동감이었습니다. 또 실제적으로도 현재 조선인 자제들 중에는 조선에 대학이 없기 때문에 상해나 북경, 또는 미국 대학에 가서 공부하거나, 혹은 일본 사립대학으로 진학하는 자가 많은 상황입니다. 외국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대개가 배일사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도 대학설립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 제도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려 대학설립 또한 급선무라고 제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재직하던 중에 가장 먼저 대학 창립 추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어서 대학 예과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제가 조선을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현재의 경성제국대학이 창설되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법문학부와 의학부 등을 둔 명실상부한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농학부, 공학부 등을 증설할 예정이며, 이 또한 결코 먼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논의가 있었지만, 대학설립은 확실히 조선통치에 있어서 일대 공헌을 이루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후 수년이 경과한 지금 대만과 같은 곳에서도 대만(臺北)제국대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는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대학교육으로부터 초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인 제도와 설비를 완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학무 당국의 절대적인 노력의 결실이었다고 확신하며, 이에 거듭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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