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세한도를 다시 읽는다. 세한도를 다시 읽는 까닭은 어느 문학 단체장이라는 사람이 남의 시의 제목을 바꾸어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때문이다. 어느 시인은 심사위원이 되어 자식의 글을 당선작으로 둔갑시켜 시민들을 절망케 했었다. 이것이 무슨 짓들인가. 남의 것에서 배우는 것은 아름다움이지만 남의 것을 베껴 먹는 것은 추악한 도둑질이다.

추사의 서체는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의 종합이다. 뿐만 아니라 원시 한자의 서체라고 할 수 있는 ‘금석학’ 연구를 통해서 필법을 받아 들여 자기화하였다. 그러므로 김정희의 글체는 “추사체” 바로 그것이다. 추사체의 완성에는 1000자루의 붓을 닳아 없애고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낸 노역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추사의 난초는 하나의 지고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아들에게 중 편지에서 “난초 치는 법 역시 예서 쓰는 법과 비슷해서 반드시 문자향(問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어야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난초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식을 가장 꺼리니, 만약 그리 그리는 식이 있으면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문자와 독서 향기가 예술의 고졸한 맛을 가능함을 일깨우고 있다할 것이다.

철종 7년 10월 10일 추사 김정희가 죽었다. “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서는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라고 <철종실록>은 적고 있다.

추사는 55세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고절한 섬에 유리안치 되어 사정없이 달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에 삶을 표백시키는 나날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이 때 해송을 헤치며 찾아드는 바닷바람처럼 고절함 속으로 청량한 산소를 공급해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문에도 능했던 역관 이상적이었다. 그는 중국을 열두 차례나 드나들면서 귀한 서책을 추사에게 연이어 보내준다. 절도에서 유배중인 추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하는 짐작은 가뭄 끝에 단비를 떠올림과 다르지 않다.

1844년 추사가 59세 되던 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세한도를 그려, 그 고마움에 답하게 된다. 세한도는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 그루씩 그렸다. 늙은 소나무는 추사의 자화상이다. 황량한 절해고도에서 해풍에 전신을 적시며 서 있는 겨울 동토의 노송은 쓸쓸함과 허망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특유의 독자성과 화면배치 등은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으로 굳센 힘이 넘쳐난다. 고법을 준수하여 필법이 굳세고 바르고 투철한 것이다.

세한도는 옅은 먹으로 시작하여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짙은 먹으로 마무리하는 적묵법으로 농담의 변화를 주고 있다. 허름한 집은 노송가지 끝의 솔잎처럼 바닷바람에 다 버리지 못한 희망으로 기대고 있다. 이 형상이 바로 추사 삶의 근간일 터이다. 그래서 일까. 이 그림은 털이 다 빠진 독필로 그려져 마치 대나무 가지로 그린 듯 거친 감촉이 유배생활의 혹독함을 감각하게 해준다. 그의 예술은 만년으로 갈수록 삶과 세월이 농익어 일체화된다. 세한도는 처연한 붓질의 감촉에서 유배생활에 대한 연민을 가져오는가 하면 왼편의 발문에는 논어의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음이 늦음을 안다” 는 글과 견주어 쓴 이상적에 대한 성정을 그려낸 인간예학이 들어 있다. 세한도는 가히 조형예술과 학문 그리고 인간학을 담아낸 종합 미학으로 감응하며 우리들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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