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동양일보) 시답잖은 나의 인문학 교양수업을 선택해준 고마운 학생들에게 종종 메일을 받게 된다. 목적 없이 살기에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될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막막한 취업난에 생계를 위한 진로를 어찌해야 할지, 청년들의 사연은 다채롭고 때로는 치열하다. 그중,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J군의 메일은 절절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사실 격조 있는 이별은 없다. 눈물, 콧물, 바짓가랑이 추태를 여지없이 구현하는 이별이 지천에 널려있다. 그러나 진심 어린 이별은 생채기는 남지만 또 다른 귀한 인연으로 재생될 기회를 부여받는다고 조심스레 조언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너희 때는 다 그래’라는 꼰대식의 반응은 청춘의 이별에 대한 아픔을 강제할 수 있다. 최대한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사랑과 이별에 대한 조언의 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럴 때면 대숲에 이는 바람이 귀에 들리는 순간 이미 스쳐 지나는 것처럼, 지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항상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 곁을 시나브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영화 ‘봄날은 간다’를 혼자서 보는 것도 아픈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썩 괜찮다고 말해준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맹세하는 순간에만 영원하기 때문이다. 만남을 운명이라 치부하며, 이별조차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식으로 애써 치환하는 것은 권태롭다. 헤어지는 연인에게 매달리기라도 할라치면, 자존감은 무너진다. 무너진 자존감은 쉬이 회복되지 못한다. 어떤 이별이든 우아함을 강요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은수의 냉정함에 애가 탄다. 겨울에 만난 남녀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을 맞으면서 삐걱거린다. 은수는 상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게 메일을 보낸 J군도 영화 속 상우와 다를 바 없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는 무수히 의미가 부여되고 소멸되는 시간들을 통하여 사랑의 순간보다는, 사랑하는 과정의 소중함을 뒤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상처받은 J군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백 마디 말보다 영화 한 편을 권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한때 앞에서 싸우고 돌아서면 악수하는 지형에 속해 있으면서도, 차마 맞잡을 수 없는 손이 있다는 것을 나이 오십에 넘어서야 깨달았다. 속이 상하지만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헤어지고 만나면서도 각자가 그려온 궤적은 결국 더 나은 관계를 향한 길이었다. 우리 모두는 상대가 떠난 뒤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용이하지 않고 때로는 격정적이지만 사람과의 관계 상실을 제대로 인정할 용기가 있다면 관계는 어느새 회복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인간관계를 관리하지 않고 흘러가게 두는 것이 훨씬 자유로워짐을 말이다. 엉켜진 마음으로 관계가 종결되었다고 생각될 때 차분한 냉각기가 필요하다. 조급한 이별은 둥글지 않고 모나다.



인간의 굴레 중 벗기 어려운 것이 자존심이다. 인간관계의 많은 갈등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발생한다. 자존심에 상처받았기에 공격한 사람을 증오하며,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 미리 공격한다. 그러나 나이의 힘은 무섭다. 서늘하고 호흡은 길다. 무의미를 깨달은 순간, 어지간한 타인의 생채기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경계가 없기에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무늬다. 타인이 주는 생채기마저도 삶의 일부로 담대하게 수용된다. 그것이 내공이다. 사랑도 내공이 필요하다. 이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이 또한 간단치는 않은 일이다.



꼬박 2년을 넘게 끼니처럼 써오던 동양 칼럼의 마지막 글이다. 처음 결기처럼 오래 생각하고 깊이 쓰자 했는데, 언제인가부터는, 해진 옷을 누비는 바늘 같은 글을 쓰며 시간에 쫓겨 밥 향기 가득한 가마솥보다는 전자레인지로 밥 글을 짓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조급하게 쓰는 글은 자신도 읽는 이에게도 결례이며 글의 향기도 없다. 이런 글쓰기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관성이 되고 만다. 마침 여러 매체에 걸쳐져 있는 원고의 무게에 심신이 지치기도 했을뿐더러 피치 못할 사정도 생겨 동양일보에 휴식을 청했다. 깊지도 않은 졸렬한 글을 곰 살 맞게 실어준 ‘동양일보’와 독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더 읽고 사색하여 깊어지면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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