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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베트남에 가는 우리 국민이 크게 늘어 하루 1만명 꼴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관광이든, 사업차든 올 들어 지난 11월말까지 베트남에 간 한국인은 316만 명으로 집계됐다고 베트남 관광청이 밝힌 것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6.5% 증가했다. 베트남 관광청은 연말까지 330만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치를 내놨다. 이같은 관광객 수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그야말로 베트남 관광산업에 ‘한국 특수’ 바람을 실감케 해 준다. 여기에는 한류바람 열풍, 박항서 감독 효과, 우리 정부의 베트남 중심 신남방정책, 한국 기업 대량 진출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우리나라를 찾은 베트남인도 42만7000명으로 지난해보다 42% 늘었다.

이같은 관광객 급증의 뒤에는 박항서가 있다.

1986년 시작된 도이모이(Doi Moi·개혁 변화)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의 길로 접어든 베트남이었지만 국민들의 수준높은 문화 컨텐츠에 대한 열망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 자리를 우리 드라마와 케이팝(K-POP)이 대신했고 베트남 젊은이들은 공연장에서 한국어로 히트곡을 ‘떼창’하는 등 한류 열풍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한류 열풍에 박항서 매직은 기름을 부었다. 아시아 축구의 변방이던 베트남 축구를 국제대회에서 두 번이나 4강에 올려놓고 급기야는 스즈키컵 우승을 거머쥐었으니 그의 마법에 베트남 국민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하다. 박항서가 나오는 광고와 방송이 끊이지 않았고 거리 곳곳, 차량엔 그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그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다.

한국에서 무명의 지도자였던 박항서가 처음엔 베트남에서 환영을 받을 리 없었다. 베트남의 한 유력 일간지는 박항서를 ‘슬리핑 원’(잠자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이런 조롱에 박항서도 언론 인터뷰에서 “베트남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튼 박항서는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쓰고 베트남을 하나로 뭉치게 한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 덕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신이 났다. 베트남에 진출한 은행들은 고객이 늘었고 화장품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베트남의 한 가족제품 판매 회사는 올 연말까지 매장을 찾는 한국인에게 상품을 무료로 주고 있다고도 한다.

박항서의 힘은 뭐니뭐니해도 양 국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 줬다. TV를 통해 베트남 전역에서 박항서 사진과 태극기가 물결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짠해지지 않은 한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와 베트남 정부도 이에 발맞춰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고 있어 당분간 드라마, K-팝, 박항서로 이어지는 한류열풍은 지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베트남 사이엔 전쟁이라는 아픈 상처가 있다. 우리는 베트남전 참전을 경제 발전으로 연결시켰지만,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는 아직도 그들에겐 상처로 남아 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빚어진 악행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6.25 전쟁때 미군의 영동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 반면교사다.

또 베트남엔 ‘라이 따이안’이라는 한국인을 아빠로 둔 자녀가 5000~1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신분노출을 꺼려하는 한인2세를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2일 홍명보장학재단 주최 자선 축구경기 참석차 고국을 방문한 박항서는 주변에서 정상에 있을 때 (베트남을) 떠나라고 권고하지만 계약이 내년까지여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지만 남은 1년동안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약속을 지키겠다는 그의 말은 베트남 국민들에게 다시한번 감동을 줬음직 하다.

지금은 한류열풍에 박항서 매직까지 겹쳐 한-베트남 관계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한 구석엔 전쟁 앙금이 여전히 있는 만큼 ‘베트남 시한폭탄’의 존재를 부인해선 안된다. 따라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동에 모두가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베트남 관광 분위기에 편승한 우리 국민들이 숙맥불변(菽麥不辨·콩과 보리를 구별 못할 정도로 어리석고 못남)의 우를 범할까 걱정이 앞선다. 괜히 돈 좀 있다고 베트남 국민들 자존심 건드리는 못 된 짓들 하지 말고 품위와 품격있는 ‘따이한’이 돼야 한다. 그들을 무시하는 경거망동한 행동은 한-베트남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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