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으로 쓴 문학의 정수 포석抱石… 조국 위한 불꽃의 시간 보재溥齋

포석 조명희문학관
포석 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 그 어떤 만남도 우연은 없다. 스쳐가는 풍경 속에도 운명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 순간 앙가슴 뛰는 일이다. 만남과 만남 속에 내 삶의 이야기가 있고 꿈이 있으며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남은 소중하다. 애틋하다. 만남을 통해 상처가 생길지라도 헛된 것은 없다.
여행이 즐거운 것도 이 때문이다. 연금술사를 지은 파울로 코엘료는 “최고의 배움은 여행에서 얻어진다”고 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했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여행 중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며 끝없는 탐구와 도전과 성찰을 강조했다,
한 번의 여행은 한 번의 인생이다.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고 무디어진 삶의 촉수를 흔들어 깨운다.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새롭다. 사람과의 만남, 풍경과의 만남, 역사와 문화의 만남 등 모든 것이 새로움이자 추억이며 사랑이자 생의 최전선이다.

이상설 생가
이상설 생가

이 땅에 태어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살다 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개인의 영광과 이익을 뒤로하고 공공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심참담(苦心慘憺)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새삼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고향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깊은 생각에 젖는다. 문화기획자로, 칼럼니스트로, 교육자로 생생한 삶의 최전선에서 창조의 샘물을 길어 올리고, 열정을 다해 살아왔지만 나만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앞선다. 내가 한 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그 결과가 가져다 줄 사회적 평판에 대한 부끄러움, 새 날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더욱 힘들고 고독하게 한다.
이 같은 생각은 진천의 이상설 선생 생가를 다녀와서 더욱 깊어졌다. 구한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인이자 민족교육자, 근대 수학교육의 선구자인 보재 이상설의 일대기 앞에서 가슴이 먹먹했다. 조국의 독립과 근대 학문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쳐 왔는데, 나는 사사로운 일에도 상처받고 쉽게 좌절하지 않았는지 번뇌에 가득찼다.
몇 해 전 KBS에서 이상설의 일대기를 특집으로 방송한 적이 있다. 중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 이상설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고난의 여정을 모놀로그 드라마로, 삽화와 샌드 애니메이션으로, 감각적인 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헤이그 특사로만 알고 있던 이상설이 독립운동사의 가려진 전략가이자 불운한 시대의 천재였음을, 광무황제의 외교특사였지만 순종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됐고,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장원급제한 유학자이면서 법학, 정치, 수학, 과학 등 근대학문의 선구자였음을 알게 됐다. 조국 앞에서, 정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다간 당신의 생가를 자박자박 걷는 내내 나의 삶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진천향교
진천향교

포석 조명희 선생의 삶도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다. 한 편의 드라마다. 대 서사시다.
진천 벽암리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공부를 한 뒤 일본에서 대학생활을 한 뒤 창작활동을 하던 중 소련으로 망명했다. 사회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그 품에 뛰어 들었다가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묶였던 그의 이름이 해금되어 다시 살아났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근대화 과정의 이야기를 몸과 마음으로 웅변하고 있다.
민족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인 소설 <낙동강>,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 <김영일의 사>, 근대 시집의 전설이 된 <봄 잔디밭 위에>, 망명 후의 저항 의지를 담은 항일 산문시 <짓밟힌 고려> 등 그 어느 것 하나 선구적이지 않은 작품이 없다. 시대의 아픔을, 조국의 쓰라린 풍경을, 저항과 도전과 불굴의 정신을 글로 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동하는 문학인이었다. <카프> 결성시 창설회원으로 활동했고, 소련 작가동맹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KGB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형을 받을 때까지 매 순간 그의 가슴엔 조국, 그리고 고향뿐이었다. 44세의 젊은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 간 것이다. “물에 불을 주고/불에 물을 주는/태양의 정의를/기억하느냐, 동무야//주림에 주먹을 주고/울음에 칼을 주는/사랑의 정의를/기억하느냐, 동무야….” 그의 전집을 읽어가는 내내 가슴이 뜨거웠다. 이기영, 한설야, 정지용 등 수많은 문학인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진천읍내에 가거들랑 조명희 문학관에 들러라. 나태해진 마음에 불씨를 지펴라.

생거진천 전통시장 풍경
생거진천 전통시장 풍경

예로부터 생거진천이라 했다. 기름진 땅과 넉넉한 인심이 있는 풍요의 마을이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5일장이 열리면 팔도의 것들이 제 다 모였다. 흥겨움과 풍요와 세상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상설과 조명희의 불꽃같은 삶을 가슴에 담았다면 진천 전통시장으로 발길을 옮기자. 삶의 향기 가득한 풍경 여행을 하자.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사진 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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