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겸 청주시 청원보건소 영하보건진료소장

 

청주시 청원보건소 영하보건진료소장 장은겸

(동양일보) 언니는 예뻤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 잘하는 언니 덕분에 시골집은 학교 선생님들이 자주 방문하셨다. 언니는 교단에 올라가 상을 자주 받았다. 어머니는 그런 언니를 자랑스러워했다. 중학생이 된 언니의 등굣길엔 늘 어머니가 동행하셨다. 책가방이 무겁다며 리어카에 언니를 태워서 30분 정도 되는 읍내로 등교시키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았어도 언니는 예외였다. 언니 가방에는 사탕이랑 껌을 멀미하지 말라고 넣어주셨고 학용품도 풍성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종이 인형 옷 입혀주는 놀이가 유행했는데 언니가 실컷 사용하고 종이가 헤져서 버리면 주워 밥풀로 붙여서 몇 번 더 놀았던 기억이 난다. 공부만 하는 언니는 방 청소며 동생 챙기는 일, 설거지 등의 집안일에서도 제외됐다. 선생님께서 오시면 나는 염소를 끌고 개울가로 풀을 뜯어 먹이러 갔다.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나는 아랫집에 사는 성례랑 등굣길 30여 분 거리를 걸어 다녔다. 학교 마치고 오는 길은 왜 그리 배가 고픈지. 성례는 급식으로 나오는 빵을 먹었는데 늘 빵 껍데기를 날 떼어주었다. 어머니가 나만 싫어하고 언니만 좋아하는 걸 알았지만 공부를 못한다는 것 때문에 나는 당해도 싸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언니 반만 닮아도 좋았을 텐데”라는 어머니의 말이 내 안에 상처로 남았고 나는 자존감이 부족해 주억거리는 아이였다.

교육열이 대단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청주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집을 구하면 늘 방이 두 칸이었다. 언니만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나머지 여덟 명이 한방에서 중학교 졸업 때까지 지내게 됐다. 언니랑 쓰게 해달라고 했지만 언니가 거절했다. 이후 다락방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해서 나만의 방이 생겼지만 언니 방을 거쳐야만 했고 언니가 자기 물건에 손대면 죽는다면서 철제 책상에 자물쇠를 걸어 놓고는 맛있는 과자랑 쇠고기 수프를 숨겨놓고 먹었다.

웬일로 어느 날 휴대용 버너로 냄비에 물과 수프 가루를 붓고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저으라고 해서 저었더니 풀처럼 됐다. 그날 아주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언니가 뭔가를 나눠 준 것이다. 수프를 몇 숟가락 먹으며 세상에 이렇게 맛난 음식이 또 있을까? 나도 돈 벌면 사 먹어야지 하고 결심을 했다. 조금 얻어먹고 설거지는 내 차지가 됐다. 냄비랑 그릇을 닦는 일이 귀찮아서 나눠준 것이었지만 그나마 먹어 본 것 자체가 좋았다.

어머니의 편애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누리는 언니의 모습이 나를 비롯한 동생들에겐 상처였다. 셋째 동생과 우리는 돈을 벌면 과자를 잔뜩 사서 박스에 담아 감춰두고 먹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다.

해마다 김장김치를 딸 다섯이 모여 어머니 댁에서 하는데 올해 언니가 변했다. 대추농사를 지었다면서 달고 맛 나는 대추를 한 봉지씩 넷 동생들이랑 어머니에게 가지고 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싶었다. 공주로 살던 언니는 절대 이러면 안 되는데 선물이라니. 그때 쇠고기 수프 얻어먹고 행복했던 그 기분이었다. 김장김치가 맛이 들어갈수록 맛있어지는 것처럼 세월이 약이었나 보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익어가나보다.

어린 마음에 차별받는다는 마음으로 조금은 공주 대접받는 언니를 미워했던 것도 지금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 명절에라도 볼 수 있는 언니가 있고 나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신 어머니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찬거리 사러 동생과 마트에 갔다가 수프가 진열돼 있는 걸 보고 동생이 그때 일을 이야기해서 한동안 웃었다. 그때처럼 그런 맛이 나려는지 카트에 한 봉지 넣는다.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을 받기만 하던 언니는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으로 길들여졌고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을 목말라 했던 동생과 나는 베푸는 것의 기쁨을 아는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어머니와 언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며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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