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엄마는, 내 아래로 딸이 하나 있고 막내로 아들도 하나 있지만 맏이인 나를 맏아들로 대우한다. 내가 친정집으로 들어와 엄마와 같이 살고 있게 된 것도 엄마 때문이었다.

“니 아버지가 안 계시고 막내아들래미는 저렇게 타곳으로 가서 직장엘 다니고 있으니 나 혼자 외로워 못 살겄다. 너 가깝게 살고 있으니 너 나와 같이 사는 게 어떠냐. 허서방도 마다하진 않을껴.” 내 성질이 남성져서 엄마와 서슴없이 지내는데다 평소 내 남편을, 아들과 다름없이 여긴다는 뜻으로 반자(半子)라고하면서 아들대우를 해왔던 것이다. 또 어릴 적 엄마와의 일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내 아래 여동생이 젖먹이 때였다. 엄마는 아기 재우고 젖 먹이려고 아기 쪽으로 몸을 향하고 나는 그러는 엄마 등을 보고 잤다. 그런데 내가 잠들기 전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먹인 후 내 쪽으로 몸을 돌릴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 젖을 더듬더듬 만지면서 입으로 엄마 젖을 빨았다. 그래도 엄만 그대로 가만 두었다. 아수를 타서 젖을 못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 여동생과 나는 여섯 살 차이다. 그냥 엄마젖이 그립고 빨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내가 너무 오래 물고 있으면 슬그머니 젖을 뺐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나한테도 그리고 당사자인 여동생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여동생에게 말했다면 그 포악쟁이 여동생이 ‘왜 내 젖 뺏어 먹었냐고 앙탈을 부렸을지 모른다. 이렇듯 엄마는 나를 어릴 적이나 커서나 지금까지도 나를 별다르게 대하고 있다.

지금 엄마는 농속을 정리하고 있다. 엄마의 농은 2단 자개농이다. 시집와서 4년째 되던 해 아버지가 들여놓은 것이라 한다. 앞면 전체에 자개를 박은 것이니 당시만 해도 시골에선 흔치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언젠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었다. “이 농을 들여놓을 때, 니 아버지가 나한테 한 말이 있다. ‘이게 쌀 열 섬’ 이라고. 그러면서 환히 웃어 보이드라.” 라고.

세월이 그간 많이도 흐른 탓인지 농안 벽지가 누렇게 바래 있고 너덜거리고 있는 것도 있다. 엄마는 농 아랫단엣 것을 주섬주섬 꺼내놓다가 그 중 하나를 밑바닥에서 꺼내들더니 한참을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엄마, 왜 그래, 그게 뭔데?” “응, 이거?” 그러더니 푸수수 웃어 보인다. “그게 뭐냐구?” “이거 니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이야.” “그러니께 그게 뭐냐구?” “이거 ‘발감개’ 라구 하는 게야.” “발감개?” “그래, 니 아버지가 옛날에 버선 대신에 발에 감았던 무명이지. 줄여서 ‘감발’ 이라고도 하는데. 막일이나 밭일을 할 때 또는 먼 길을 걸을 때 자주 이용했니라.” “그래, 왜? 양말이나 버선이 없어서?” “옛날엔 어디 양말이 지금처럼 흔했냐. 그리구 버선은 두루매기 차려 입구 어디 갈 때나 신었지 집에서 논밭일 할 때는 이걸 고무신이나 짚신에 감구 일하셨다.” “난 그거 감구 일하시는 거 못 봤는데.” “너 낳구두 이걸 감구 일하셨는데 너 어리구 또 나가서 학교 다니느라 몰라서 그렇지.” “우리 집이 옛날엔 그렇게 가난했어. 동네선 그래두 고등학교 대학교 보낸 집은 우리 집밖에 없었잖아?” “가난해서라기보다 옛날엔 시굴에선 거의 다 그랬어. 니나 나나 시방두 밭일 할 때는 양말 대신 잘 벗어지지 않고 푹신한 발목 긴 신식 버선을 시지 않냐. 그게 일하는 덴 편하니깐. 그와 마찬가지야.” “그래? 근데 왜 그걸 여태까지 보관하고 있어. 아버지 유품 하나두 없잖어?” “이거 하난 남겨놨지. 아버지가 이거 발에 감구 일해서 이 자개농두 나한테 사주신 게야. 그걸 잊을 수가 있냐?” “엄마 지금 아버지 생각하구 있는 거야?” “뭐여, 왜 난 니 아버지 생각하믄 안 되냐.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구 허서방한테나 잘해 껀듯하믄 메어박는 소리 하지 말구.” “알았수, 알았수.”

엄마는 구십 중반을 넘기면서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혼자 멍하니 문지방에 기대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는 횟수가 늘고, 자주 둘째딸네 막내아들네의 안부를 물으면서 외지에 나가 있는 외손자 친손자가 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얘, 인제 니도 칠십으로 들어섰지. 참 세월 빨러 발써 그리 됐으니….”하고 심란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 그 발감개 나한테 줘.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그러는 나를 엄마는 한참을 처연하게 쳐다보더니, “그래 그러마. 그리구 후제엔 막내한테 넘겨줘. 간수 잘하라구 하구.”

그리고 그 발감개를 넘겨주는데 퍽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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