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 2019년, 교수신문에서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의미로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맡은 책임은 무겁고, 이를 실천할 길은 어렵고 아득하다.”는 뜻풀이가 돼있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국내정책 등 수 많은 난제를 정부가 굳센 의지로 헤쳐 나가길 바란다는 염원으로 눙쳐 봐도 한 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는 너무 무겁다.

2등을 차지한 ‘밀운불우(密雲不雨)’도 만만찮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구름만 잔뜩 끼어있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 취업포탈사이트에 올라온 사자성어도 하나같이 어둡고 무겁다. 구직자가 뽑은 ‘고목사회(故木死灰)’는 “마른나무나 식어버린 재(灰)처럼 생기와 의욕이 없는 상태”로 어감만큼이나 비감스럽다. 자영업자가 뽑은 ‘노이무공(勞而無功)’도 한 푼 위로가 되지 않는다. “수고는 해도 공이 없다”는 뜻이니, 수시로 개업간판이 바뀌고, 한집 건너 ‘폐업처분‘과 ‘임대문의’를 내건 빈 점포들이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황금돼지해, 올 한 해를 아우르는 사자성어가 모두 듣기에 거북하고 새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지만 고르긴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황금돼지’에 억지희망을 걸기보다는 춥고 배고픈 현실을 바로 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귀에 거슬리어도 제대로 뜻을 새겨야, ‘져야 할 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고, 방향도 옳게 잡을 수 있다. 불평등의 사회구조, 신뢰가 바닥난 경제해법,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바뀌는 교육정책, 되풀이 되는 인재(人災)와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가 혀를 차게 만드는 현 세태를 그저 기분 좋은 말마디로 쓸어 담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학생은 학생으로서, 청년은 청년으로서, 사업가는 사업가로서,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각자가 감내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를 공감해야 ‘함께’ 나눠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맡겨진 무게가 합당하다고 느껴지면 가는 길이 고되거나 억울하지가 않다. 저울추가 부당하게 한 쪽으로 기울면 ‘내 탓’보다는 ‘네 탓’을 먼저 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새해, 또 하나의 덕목은 ‘기다림’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빨리빨리’가 가져온 조급증의 폐단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대상(隊商)들처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들이 기원전 2세기부터 중국, 티베트, 네팔과 인도를 잇는 약 5,000km에 이르는 ‘고도(古道)’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발 4,000미터의 설산을 넘고 험준한 협곡을 ‘함께’ 걷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랜드 마크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이 전하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일명 ‘가우디 성당’으로 불리는 이 건축물은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해 올해로 137년 째 짓고 있는 미완성 건축물이다. 안토니 가우디의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생전의 그의 말처럼 ‘빨리빨리’와 개발논리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가히 신의 영역이라 할 만큼 오랜 세월이다.

이 엄청난 건축물의 재정이 오직 헌금과 관광객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건축기간이 또 다른 이야기 거리가 되어 미완의 건축물로서 매년 3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될 수 있었다.

새해는 새해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고 미리 기죽을 필요는 없다.

가야 할 ‘길(道)’이 얼마나 남았는가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갈 길이 멀어도 언젠가 길은 끝나게 돼 있다.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방법은 ‘함께’ 걷는 것이다. 신뢰가 있으면 희망이 생기고 희망이 있다면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 안 잡히면 내일, 올해가 안 좋으면 내년엔 나아지겠지요. 늘 속고 사는 삶이지만 바다는 여전히 희망이지요.” 한 어부의 인터뷰가 감명 깊다.

돼지의 탐욕스러움과 성급함을 경계하며 한 해를 잘 보낸다면, 연말에는 정말로 황금 복 돼지가 귀여운 엉덩이를 흔들며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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