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지난해 8월 7~8일, 충북 보은군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에서 보은군 주최, 동양포럼 주간으로 노년철학 제1회 한일국제회의(포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개최되었다. 산속의 회의장에서 이틀 동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경까지 1시간의 점심시간을 두고─점심시간도 때때로 자유토론 시간으로 변했지만─자유롭고 열렬한 논의를 했다. 참가자는 26명으로 80대부터 20대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였다.

노년철학은 결코 노년‘만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참여자의 발제 내용은 미리 동양일보 지면에 게재하여 공유했다.(일본인 참가자는 ‘미래공창신문(未來共創新聞)’을 통해 발표내용이 공유되었다.) 속리산의 회의장에 모인 사람이외에도 널리 보면 동양일보 독자 모두가 이번 회의의 참가자라고도 할 수 있다.


●보은 땅에서 노년철학을 하는 의의

개회식에서는 주최자인 정상혁(鄭相赫) 보은군수가 환영 인사를 하였다. 정 군수는 현재(2018년) 76세로 한국 최고령 지차체장이다. 보은 땅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고 한말에는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崔時亨)이 한때 근거지로 삼고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열어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보은군은 충청북도 안에서 가장 장수노인이 많은 고장이라 한다. 당연히 독거노인 문제도 심각했고 노인의 자살사건도 자주 일어나고 있었단다. 이와 같은 노인들이 놓인 상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꾸려고 정 군수는 노인대학을 개강하고, 취미와 문예활동을 일으키어 30군데 가까운 노인회관을 세우는 등 각가지 노력을 해 왔는데, 이제 보은 땅에서 노년철학 국제회의를 열게 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며 앞으로도 1년에 몇 번씩 개최하고 싶다는 기대를 밝혔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30년 가까이 추진해온 교토포럼 공공철학공동연구소(公共哲學共働硏究所)의 활동을 회고한 후, 교토포럼의 주관자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동일본대지진의 피해를 입은 센다이(仙臺)나 오사카(大阪), 청주(淸州), 익산(益山) 기타 지역을 기점으로 하면서 지역간, 세대간, 남녀간의 상극‧ 상생‧ 상화의 인문학을 펴오는 가운데에서, 금년부터는 특히 한‧일간 공통문제로서의 노년문제를 삼세대―청소년세대‧ 중장년세대‧ 노숙년세대―간의 상보‧ 상생‧ 공복(共福)의 인문학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에서, 우선 새로운 노년철학의 공동구축을 지향하는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의 대화 과제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라는 문제를 한일간의 자유롭고 활발한 대화를 통하여 함께 성찰해보는 기회로 삼고 싶다는 뜻도 덧붙였다.

지금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저출산 고령화가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한국정부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인 것을 감안하면, 시기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한일의 생사관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전 쇼센지正泉寺 주지): 나는 정토진종(淨土眞宗) 다카다파(高田派)의 전 주지이기도 하여, 일본불교의 입장에서 생사관을 설명하겠습니다. 정토진정은 13세기경에 일어난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鎌倉新佛敎)’의 일파로, 현재 일본인의 70%가 소속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생사관은 지금도 일본인의 생사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정토진종에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이라고 말하여 삶과 죽음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삶에서 죽음,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고 생과 사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치성(一致性)의 사상은 진종만이 아니라 불교의 일여(一如), 이슬람의 타우히드(Tauhid), 힌두교의 바크티(bhakti) 등 다른 종교 사상과도 공통됩니다. 물론 일본에는 신도(神道)라는 고유의 샤머니즘 종교가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일어나고 불교 우위로 불교와 신도가 융합‧ 공존되어 왔습니다. 신란(親鸞)은 86세 때 ‘자연법이(自然法爾)’를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바로 이러한 생사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메이지정부가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신도(國家神道)를 확립하면서 신불 습합된 생사관에서 불교적 요소를 배제시키려 했습니다. 메이지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나라를 위해 죽은 자가 도쿄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나 각 지방의 호국신사(護國神社)에서 ‘영령(英靈)’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불교적인 요소가 없고 사망자의 혼은 이제 부처가 아니라 국가와 합일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한’사상은 개별생명과 우주생명의 상관연동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생사관은 어떠신지요?


김용환(충북대 교수): 한국인의 영성 이해에는 유교·불교·도교·서교(西敎, 즉 그리스도교)의 4교가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하늘의 영성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무(巫)적 영성과 하늘을 향해 산을 올라가는 선(仙)적 영성, 그리고 하늘의 영성이 있습니다. 단군설화의 빛의 대왕인 환인(桓因)과,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과, 나이가 들어서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된 단군(檀君)의 세 명의 신은 그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한국인에도 삶과 죽음을 생사상생(生死相生)의 ‘한’으로 바라보는 생사관이 있습니다. 생사가 일여(一如)라는 것은 사실 놀라운 발견입니다. 생사는 파도와 같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개체생명의 끝으로 두려움과 고독감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큰 시야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통한 사람은 살아서 기쁘고 죽게 되어도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영원한 영의 활동을 ‘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온갖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윤리교육은 영성을 잊어버리고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른 궤도가 없고 죽은 윤리학이 되어 버렸습니다. 머리(생각/이성)과 가슴(느낌/감성) 뿐만 아니라, 영성 즉 우주생명=근원적 생명력과 개체생명의 만남을 자각하는 영성인문학(靈性人文學)이 필요합니다.


박맹수(원광대학교 교수): “기타지마 선생과 김용환 선생 두 분께선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기보다 하나의 것,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한국의 경우에는 생사관의 근본에 <한>이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적 생사관에는 유교‧ 불교‧ 도교‧ 서교(西敎; 기독교)적 영성이 있다고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곳에 샤머니즘(巫敎)이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점을 평가하고 싶어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한 사례로, 특히 장례식에 대해 어떤 사람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축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생자(生者)와 사자(死者)가 화회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또 장례식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끼리 갈등을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화해하면서 죽은 사람을 다음 생으로 보내는 자리입니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가 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미에현(三重縣)에 전통적으로 장례식을 맡아온 무죠코(無常講)라는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지구적 규모의 자본화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2015년에 나온 <사원소멸(寺院消滅)>(우카이 히데노리鵜飼秀德 저, 2015)는 현재 일본에 약 13,000개의 사찰이 있는데 2040년까지 30%가 없어진다는 충격적인 책입니다. 한국사회도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장례문화를 맡아온 문화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기타지만 선생에게)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이것에 대해 어떤 대응 방법이나 새로운 움직임은 있습니까? 둘째, 질문은 그것에 대한 일본불교・ 종파의 대응책은 어떻습니까?

기타지마: 무죠코(無常講)는 죽은 사람을 공동체에서 보내는 것 입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재가(在家)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절의 사람은 면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죠코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극히 일부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장례식도 대부분 장례업자에게 맡겨지고 장례식장으로 치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10년 전부터 ‘활기차고 문화가 품기는 마을 만들기’라는 마을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두 가지 사라져가던 행사를 재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무시오쿠리(해충 내보내기) 행사입니다. 전년에는 마을 주민 300명이 참가했고 올해는 5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욧카이치(四日市)의 무시오쿠리는 노인층・ 젊은층・ 어린이 3세대 500명이 참가했는데, 이런 행사는 일본에도 따로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노인들만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통행사를 현대적으로 되살리고 농약을 쓰지 않고 농업을 재생시키는 것은 지역공동체를 재생시키고 토착문화를 되살리는 것으로, 세계화의 대항축(對抗軸)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 샤머니즘에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을행사도 부활되고 이미 그 싹은 텄습니다. 무시오쿠리에는 여명이 며칠 안 되는 암환자 주민도 나갈 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하고, 비일상(非日常) 속에서 아이도 젊은 엄마도 즐겁게 참가합니다.

사원 소멸은 과소화가 진행된 산인지방(山陰地方)에서 더욱 심각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신앙심이 열렬한 지역부터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대를 이은 집안신앙이 붕괴되고 도쿄에만 인구가 집중하면서 사찰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공동체의 유대감을 갖는 운동이 사찰재생으로 이어집니다. 할 일을 하면 의외로 사람들은 모이게 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김태창 주간: 생사관의 재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노년철학은 추상적인 공리공론에 그치고 말 공산이 큽니다. 그런 뜻에서 김용환‧ 키타지마 기신 두 선생님께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까? 아니면 죽어도 남는 것이 있습니까?

김용환: 안 보이는 세계, 즉 영과 혼의 차원으로 보면 삶과 죽음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에서 보면 죽으면 신체가 분해되기 때문에 죽으면 끝으로 보입니다. 혼은 그치지 않는데, 이 점을 사람들은 자꾸 망각하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할아버지도 연속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김태창: 죽음을 육(肉)과 혼(魂)과 영(靈)의 차원으로 나누워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육은 죽어도 혼과 영은 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김교수는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다면 아버지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것은 ‘육’이 아니고 ‘영’이나 ‘혼’이라는 것입니까?

김용환: 불교에서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아귀계(餓鬼界)에 전생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 가지 않도록 혼을 구제하게 위해 천도재(薦度齋)를 지냅니다. 주자(朱子)도 4대(代)에 제사를 잘 지내라고 했습니다. 혼은 육신이 죽어도 금방 해체되지 않고 영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불교세서 말하는 법신(法身)은 왕생하지 않습니다. 아라한과(阿羅漢果)는 그 영-법신을 분명히 깨달은 이를 이름함이고,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은 그것을 공적영지(空寂靈智)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영혼의 시대가 망각된 시대입니다.

기타지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개별과 일반을 2중화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동물에는 개별이 있으나 유(類)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인간은 일반화할 수 있고 개별을 꿰뚫는 일반법칙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밖에 모르는 인간은 “비인간적인 놈”이 되고 맙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본래의 인간이 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신란(親鸞)은 “죽은 뒤가 아니라 지금에 가져오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낡고 자기중심주의적인 개체가 죽고 새로운 ‘유(類)’로서의 인간, 종교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타자를 위해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타타가타(如來)는 인도말로 ‘진실에 갔다’는 뜻입니다. 분석하면 타타-아가타(돌아오다) 즉 진실세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우리를 인도하는 자를 이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애서 흑인은 예수가 투쟁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데즈먼드 투투(Desmond M. Tutu) 대주교는 달라이라마 14세와의 대담에서 “석가님이 우리를 지도해 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근원적-우주적 생명력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통한다는 것입니다.

김태창: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히도’는 ‘히’(火‧ 魂‧ 영(靈=근원적 생명력)와 ‘도’(戶‧ 門‧ 處=머무는 곳)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히도’는 근원적 생명력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를 다자인(Dasein; 실존, 현존재)이라고 규정했는데, Da는 ‘거기에’라는 장소‧ 곳‧ 차원을 말하고, Sein은 ‘근원적 존재 자체’를 말하는, 그 두 개의 말의 합성어인 Dasein은 결국 근원적 존재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는 점에서, 일본의 ‘히도’와 기본 발상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사람’은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생명자각론적입니다. ‘사’는 삶(生‧ 生命‧ 生活)이라는 말과 연격되는데, 삶은 다시 살=사르다=몸에 담긴 근원적 생명력을 불사르듯 온전히 살린다는 뜻의 말과, 앎(知‧ 覺‧ 醒)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근원적 생명력을 온전히 올바르게 살리는 주체임을 자각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생사(生死)관이라는 말을 쓰는데, 일본에서는 사생(死生)관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생을 중심으로 사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사에서 생을 생각한다고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보내고 맞이할 것인가?

가타오카 류(片岡龍, 도호쿠대학東北大學 교수): 전에 동양일보에 게재된 글 속에서 김영미 선생이 돌아가실 어머님에게 “아이들은 잘 지켜줄 데니까 편히 가십시오.”라고 한신 말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모성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현재 공포의 대상이 옛날과 많이 바뀌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이제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늙어서 젊음을 잃은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김영미(시인·문화평론가): 죽음에 대해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은 남성적도 여성적도 아닌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저는 죽음의 의미를 실감했습니다. 20년 전부터 함께 살았는데 시어머니는 당뇨로 아프셨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다릅니다. 남성은 지성적이고 결론을 중시하는데 대해, 여성은 감성적이고 슬픔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은 울기만 하고 있고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나도 어머니와 눈이 맞고 무언가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무 생각도 없이 아들은 제가 잘 지켜줄 테니까 편히 가시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흐르다가 편한 모습으로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가 고통스럽게 가신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과 더불어 생사관의 변화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저출산, 비혼(非婚)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독사(孤獨死)나 사건 등에 의한 갑작스런 죽음은 젊은 사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는 꼭 노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혜련(충북대학교 강사): 남성의 죽음과 여성의 죽음에는 다른 성질이 있습니다. 혈연(血緣)과 비혈연(非血緣)의 차이도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부모가 아닌 양부모를 보낼 때 이성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친부모와 차원의 차이가 있음에도 충분히 애도하는 것에도 생자가 사자를 슬퍼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타지마: 정토진종 지역에는 ‘비시(非時)’라는 장례식 때 먹는 특별한 회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추가 들어간 국과 다시마 요리인데, 아주 매운 것을 먹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오기 때문에, 장례식 때 흘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종토진종의 교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종토진정의 교리에서는 수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극락정토로 가는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친한 사람이 죽으면 슬픈 것은 자연스러운 인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추 탓으로 돌려라, 슬픔을 참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례라는 것을 지역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고추가 들어간 요리를 모두가 함께 먹고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또 자연사의 경우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자기 죽음을 알게 되는데, 진종지역 사람은 그 때가 오면 스님에게 임종설법을 듣고 장지를 다시 바르고 장례식의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인생은 좋았다. 이렇게 좋은 인생은 따로 없다”고 하면서 죽어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됩니다.

김혜련: 슬픔을 살아가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군요.

박완규(전 충북대학교 교수): 가타오카 선생은 우리의 공포 대상이 이동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포 대상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신앙의 상실에 따른 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미: 죽음이란 무엇인가보다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창작물에서 그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에 대해 나는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죽음은 남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지 자기가 부재하기 때문에 드라마나 임종, 무덤, 장례식 등을 통해 죽음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삶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혈연자(血緣者)가 돌아가셨을 때 어떻게 하면 될까? 돌아가신 사람의 기억은 죽지만 돌아가신 사람은 기억 속에서 빛납니다. 문학적 접근은 이것에 대한 유효한 수단일 것입니다. ‘죄와 벌’, ‘신과 함께’ 등의 작품은 소수-약자-아버지-사회 소외 등을 그리면서 사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 세대에는 윤리와 케어가, 혈연이든 아니든 죽음에 대한 위안과 케어가 필요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과 ‘죽어도 끝나지 않음’

최다울(일본 도호쿠대학 학생): 어느 조사에 의하면 ‘죽으면 끝’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70%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인에게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은 믿기도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최근 늘어나고 있는 고독사(孤獨死)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 생사의 연속과 단절보다 살아 있는 동안에 대화부족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김주미: 죽음에 대한 생각에는 지역간―서양과 동양, 일본과 한국 등―차이도 있고, 세대간―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차이도 있으며, 남녀간의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미: 젊은이의 70%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놀랐습니다. 한일의 죽음에 대한 의식에는 차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돌발적인 죽음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습니다. 일본인의 생사관 중에서는 죽으면 벼로 전생한다고 본 에도시대의 사상가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생사관이 흥미롭습니다.

가타오카: 최다울 군이 말한 ‘죽으면 끝’이라는 학생들의 생사관은 윗세대들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윗세대는 더 윗세대를 본받는 것이고요.

한국과 일본은 자연의 감각이 다릅니다. 한국이 비교적 안정적인 것에 대해 일본의 자연은 변화가 극심해서 야생적입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뜻밖의 죽음에 대해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바뀔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인의 사생관은 크게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생각과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전자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사관으로, 후자는 재생 후의 새로운 생명을 생각하는 생사관으로 이어집니다. 양자의 대립은 재배문화가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사생관과 들어온 후에 정착된 사생관의 대립으로 연유된다고 보입니다. 전생을 인정하는 안도 쇼에키의 사생관도 후자에 분류되는데,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점에서 인간과 다른 것과의 서열화가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오늘날 도호쿠(東北)지방은 쌀의 명산지이지만 그렇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로 수렵문화의 흔적이 비교적 짙게 남아 있습니다.

정상혁 보은군수: 내 학생시절에는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우리 하숙에는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모였었는데, 강릉에서 온 선배가 어느 금요일에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나도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4시경에 정신을 잃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죽은 선배는 장래를 촉망받은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그렇게 죽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습니다. 삶이 허무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사관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죽어도 그 후에 무엇이 남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역시 올바른 생사관의 필요를 실감합니다.

조성환 원광대 연구원: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에는 눈물이 났습니다만, 2년 후에 돌아가셨을 때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당대의 왕은 볼 수 없었습니다. 실록은 뒤 세대에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어느 왕은) 환관이나 젊은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떤가라는 신하의 권유에 대해 그것은 ‘시후지도’(視後之道, 후속 세대를 보는 도)가 아니라고 물리쳤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19세기 이전의 생사관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존재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생명은 이어지다

히도미 아오이(人見葵, 일본조치대학上智大學 4학년): 지금까지 논의를 들으면서 세 가지 느낀 바가 있습니다. 먼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여기에 오기까지 나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최다울 씨에게 나는 “죽는 것은 무섭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무서워지는 것 같습니다.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무럽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읽어 보아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것은 22세가 되도록 가족의 죽음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이가 들은 사람이니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김영미 선생이 “사람이 죽을 때 누군가가(그 사람을) 기억해 주고 싶어 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왜 기억되지 않는가?”에 대해 충분히 생각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일본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나는 어느 의료계 대학에서 4년 전부터 의학부・ 약학부의 여학생들에게 생사관을 가르치고 있고, 300명의 학생에게 가꿈 각자 1000자 정도의 글을 짓는 과제를 냅니다. 그것을 읽어 보아도 역시 남자와 감각이 다릅니다. 그것을 보면 역시 관계성을 중시하는 것이 여성의 생사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남자 친구들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완결형의 생사관에 익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여동생이 손자를 보았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기자 일에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집안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손자를 매일 2시간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 손자를 보면 남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인(人), 틈-간(間)이라고 쓰는데, 말 그대로 존재 사이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이 죽으면 모두 끝난다는 생각은 오히려 동물에 가깝습니다. 이에 대해 여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인간은 죽어도 관계성이 남는다는 생사관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김태창: 노년철학 포럼 제1회 학술회의―우선 한일 대화의 모임이라는 형식으로 마련했지만―를 마치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세 가지 문제의식으로 정리함으로써, 다음으로 이어지는 진행방향을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문제의식은 노년‧ 노인‧ 늙음‧ 늙은이‧ 시니어‧ 실버에이지 등등 특정연령―가령 65세―에 도달한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왜 무슨 뜻을 담고 그런 어휘들을 쓰게 되었는가? 말하자면 그 사회문화적인 인식배경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올바른 노인상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이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인데, 왜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 하고 외면하려고 하는가? 왜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른 대응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올바른 생사관 또는 사생관을 진솔하게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의식은 왜 한국과 일본의 비교를 중심으로 대화를 계속하는가에 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세계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먼저 철저하게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와 여러모로 관계가 깊은 문제들을 대응‧ 처리‧ 개선시키려는 데 있어서 앞장선, 말하자면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의 선진국이라,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고령화가 훨씬 늦어서 거기에 대한 인식이나 대응이 미흡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인식이나 대응이 잘되고 있는 점도 있으나 고령화 자체가 인본이나 한국에서처럼 가속화‧ 심층화‧ 광범화되어 있지 않아서 문제의 심각성이 훨씬 덜합니다. 그래서 우선 한일대화‧ 공동대응‧ 공동개선의 필요와 중요성이 제대로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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