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중원대 교수

이상주/ 중원대 교수

(동양일보) 율곡의 후예들은 용을 잘 받들고 용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용은 그 정성과 탁견에 대한 보답으로 구곡(九曲)을 선물했다. 이리하여 구곡은 율곡을 숭상하는 기호사림들이 앞섰다.

용의 기를 받을 준비를 해놓은 마을에는 용의 기상을 발휘하는 인물이 출현한다. 충북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 오룡동(五龍洞)도 이에 해당된다. 송시열의 출생지는 충북 옥천군 구룡리(九龍里)이다. 『주역』 구오(九五)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의 구(九), 오룡동은 오(五)를 적용했다, 전엔 지금의 신촌,도촌,대촌,상리,오룡,도촌등 화산리를 오룡동이라 불렀다. 그래서 높음뱅이와 매봉재에서 흘러오는 작은 개울에 놓은 다리를 오룡교(五龍橋)라 했다. 지금은 도촌과 오룡동만 도촌리로 묶고, 나머지 3개 마을은 각각 독립 행정리가 되었다.

용들은 조일전쟁 때 괴산에서도 왜구를 척결했다. 율곡의 맏형은 이선(李璿), 둘째형은 이번(李璠)이다. 율곡의 아우 이우(李瑀 1542~1609)가 임진왜란 때 괴산군수를 했다. 문광면 송평리 출신 의병장 조덕공(趙德恭1547~?)은 율곡의 제자이다. 조복(趙服1525~1592)은 이우, 우정침(禹廷琛1564~1633), 윤우(尹佑), 조덕수(趙德秀), 승장 운우(雲雨)와 의병을 모으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이우는 「제조함안문 명복(祭趙咸安文 名服)」을 지었다. 이단하(李端夏)는 「옥산전(玉山傳)」에 “이우는 괴산 북쪽 산골짜기에 들어가 기계를 설치하고 복병을 두어 많은 왜적을 포획했다”고 기술했다. 조복의 아우 조반(趙胖1528~1593)도 왜군과 싸웠다. 조복의 아들 조덕용(趙德容1564~1638)은 율곡에게 수학했으며 율곡의 맏형 이선의 맏사위다. 이번은 이경승(李景升)과 이경정(李景井) 두 아들을 두었다. 이경정이 이우를 따라 왔다가 오룡동에 살게됐다. 이번의 묘소는 지금 북한 장단에 있었는데 1700년대 후반 5대손 희진(熙鎭1696~1756) 창진(昌鎭1715~1779)등이 오룡동으로 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용을 『괴향문화』 제19집, 「이번․이우의 사적과 율곡선생남매분재기번역」과 2013년 『괴산인물지』에 수록했다.

2013년 경 여름 이경정의 둘째아들 굉의 종손 이덕렬(李德烈)이 말했다. “개울을 향해 있는 저 길고 낮은 등성이를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형국이라서 해서 오룡쟁주혈(五龍爭珠穴)이라 했다. 집에 한문고서들이 많았는데 연풍으로 이사 갈 때도 가져갔다. 한글시대가 돼서 보지 않게 되고 사는데 힘쓰다 보니 없어지는지도 모르게 없어졌다.” 이 혈의 끝에 화산교회를 지었다. 오룡동 뒤 구릉에 이번의 묘소가 있다. 그 아래 연못가에 오룡동서당(五龍洞書堂)이 있었다. 흙기와 파편이 남아있으며 지금도 서당골이라 부른다.

도촌마을에 청룡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청룡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지은 이름이다. 청룡으로 예우를 해주니 용도 흐뭇하여 기를 내려주었다.

청룡암 동쪽으로 아늑한 안동네가 있다. 지형이 청룡포태형(靑龍胞胎形)이다. 용정(龍井)이 지금도 남아있다. 집주소가 지번으로 243번지 그 옆집은 27번지이다. 연유는 모르지만 묘하다. 각각 합치면 9이다. 243번지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주(周)나라의 재상(宰相)이 되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정치행정적 재상은 아니지만 충북 한문학계에서만은 그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어진이를 본받고(상현象賢)’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지 않는다(승기자염지勝己者厭之)’를 실천했다. 한지로 엮은 목판본 『주역』 과 풍수에 관한 책이 남아있다. 그 고조할아버지가 보시던 책이다.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이 성황천(城隍川)이다. 민속적 신령적 신앙적 의미를 담았다. 그는 이 계곡에 2009년 9월 9일 군자구곡(君子九曲)을 정하고 「군자구곡가(君子九曲歌)」를 지었다. 제4곡이 용유암(龍遊巖)이다.

오룡교 성황천 하류 문광면 유평리에 용암(龍巖)이 있다. 완연 큰 용의 머리 모양이다. 이 중턱에 괴산의 낙화암이라 극찬을 받는 매죽정(梅竹亭)이 있다. 이 마을에 현존 최초의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의 저자 이문건의 후손이 살고 있다. 그는 창의융합학문교육의 제1인자로, 최초의 작품만 7가지다. 이문건도 주역의 대가다.

2018년부터 성황천재조공사를 하고 있다. 용들을 위해 개조단장미화하는 것이다. 완공 후 성황천일대는 문화명천이 되어 ‘대한민국신기상발원지’로 문화성세를 구가할 것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