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274년 1월 몽고군 선발대 4500명이 창원(합포·의안)에 도착한데 이어 같은 해 5월, 본군 1만 5천 명도 이곳으로 들어온다. 6월에는 수군 600명을 태운 전함 900척이 이곳에 닻을 내림으로써, 당시 합포는 2만 5천 명의 몽고군과 짐꾼과 뱃사공 그리고 군사 8천 명으로 꾸려진 고려 수군 1만 5천 명이 주둔하게 된다. 합포는 갑자기 창졸지간의 4만여 연합군이 득실거리는 당대 세계 제일의 군항으로 변해 버렸다. 이 내용은 역사책 고려절요가 전해주고 있는 내용이다.

신라시대에는 창원은 의안이라 하고 마산은 합포라 불렀다. 아직도 마산 회원구 합성동에 80m 정도의 합포성 돌무더기가 희미한 역사의 흔적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여몽연합군 병참기지가 세워졌던 곳이다.

1차 일본 정벌에 나선 4만의 여몽연합군은 1274년 10월 20일 대마도의 주간 전투에서 고려군의 활약에 힘입어 크게 승리한 후, 기세가 등등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연합사령부에서 여몽 장성들이 군사작전 회의를 갖게 된다. 고려군 김방경 장군은 낮에 왜구를 괘멸 시킨 여세를 몰아, 하카타 연안에 배수진을 치고 육지로 밀어붙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몽고 장군 흔도와 홍다구는 "피곤한 군사를 몰아 적지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다"며 연합군을 하카타항으로 후퇴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하카타로 군대를 물린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에 태풍(가미카제)이 몰아닥쳐 모든 함대가 나무조각 부스러기로 변해 버렸다. 합포로 후퇴하여 군사를 헤아려보니 1만 3천 5백 명의 병사가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김방경 장군의 주장을 따랐다면 역사상 일본의 신풍(가미가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몽고군 수뇌부의 잘못된 선택은 일본인에게 가미가제라는 잘못된 신념을 심어주었고 그로 하여 그들은 헛된 야망을 세계역사 속에서 투사시켜려 들게 하였다. 몽고 장군의 잘못된 선택이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진주만을 공격하는 역사적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1차 일본 원정에 실패하자 몽골 황제 쿠빌라이는 1280년 8월, 고려 임금 원종을 연경에 불러들여 군사 작전을 세운다. 1281년 5월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 4만은 아예 일본 본토를 향해 출정식을 결행한다. 합포를 떠난 연합군은 풍랑과 싸우느라 많은 군사를 파도 속에 밀어 넣으며 6월이 되어, 이키섬에 당도하게 되었다. 때 아닌 전염병과 싸우며 이틀 동안 일본군과 사투를 벌였으나 참패하고 만다. 중국 강남에서 오기로 한 10만 군대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기는 고사하고 이 또한 풍랑에 휩쓸려버린다. 총 14만 명의 연합군은 겨우 3만 3천이 살아남는다. 천우신조로 풍랑(가미가제)이 일본을 위해 불어준 것이었다.

당대 세계 최대의 해군항 합포(마산)와 이를 받쳐주던 위성도시 의안(창원)의 백성들은 참패한 두 번의 원정군을 지원하는라고 골육을 참담하게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요구대로 인력과 군량은 물론 호미와 기둥뿌리도 빼서 전함을 만드는데 받쳐야했다. 이 후 세월이 100년을 훌쩍 넘어 선 1413년, 태종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이곳에 설치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진한 이종무군단은 1419년 6월 19일 거제 주원방포를 떠나 대마도 징벌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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