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감으로 여는 세상, 철 모르면 철들러 가자

철박물관 상설전시장
 

(동양일보) 달력 앞에서, 책들의 무덤에서 서성거린다. 한 해의 마지막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깊어가던 가을 날, 어머니가 마당 한 가운데서 서리태를 까불며 정갈하게 세 갈래로 나누듯이 나도 내 삶을 나누었다. 어머니는 가장 좋은 콩은 내년에 씨 뿌릴 종자로 남겨두고 그 다음 좋은 것은 이웃들 품삯과 설에 찾아올 삼촌들 선물로 챙겨 놓았다. 나머지는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라고 하셨다.

좋은 일, 그저 그런 일, 슬픈 일. 내 삶도 이렇게 세 갈래였다. 좋은 일은 건강을 되찾고, 사랑을 되찾고, 일을 되찾은 것이고 그저 그런 일은 돈이 따르지 않았으니 운명으로 치자. 슬픈 일은 아직도 내 가슴에 증오의 벽이 헐리지 않은 것이다.

새 해에는 증오의 벽에 그림을 그려야겠다. 그 벽에 꽃을 그리고 새도 그리고 물고기도 그리며 바람이면 또 어떤가. 내 마음껏 희망하는 것을 그리고 젖고 스미게 해야겠다. 새 해에는 증오의 벽에 햇살 가득하고 사랑이 깃들면 좋겠다.

새 해의 다짐을 가슴에 품고 떠난 곳은 음성의 한독의약품박물관이다. 1년 전 당뇨병으로 쓰러진 병력을 갖고 있기에 그곳의 속살이 되우 궁금했다. 퇴계 이황은 <활인심방>이라는 의학서에서 ‘좋은 마음과 반듯한 생활습관’을 건강과 장수의 비법으로 소개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규칙적인 운동과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지 않을까.

한독의약박물관은 (주)한독 공장 내에 위치해 있다. 경비실에서 인터폰으로 방문자의 신원을 밝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드넓은 공장 일원에 예쁘게 다듬어진 조경을 보는 순간 기분이 삼삼해진다. 박물관 역시 소나무숲과 잔디밭의 옛 석물로 다듬은 정원이 일품이다. 박물관 입구에 있는 약연탑이 눈에 뛴다. 창업주 김신권 회장이 직접 디자인했다는데 사자 한 마리가 약연으로 약을 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 땅의 의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곳은 1964년 ㈜한독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문화사업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박물관이자 전문박물관이다. 보물 6점을 포함해 2만 점의 동서양 의약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의약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한국 전시실, 동서양 각국의 의약자료를 전시한 국제전시실, 한독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한독역사실, 의료를 포함해 건강과 삶을 예술작품을 조명하는 생명갤러리, 한독 창업주 고 김신권 회장의 기증품을 전시한 제석홀 등으로 구성돼 있다. 때마침 생명갤러리에서는 ‘약장 이야기’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약을 소중히 여겼기에 집집마다 약장을 만들어 보관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정보도 없고 기술도 일천했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픈 시대를 어떻게 보냈을까 궁금했다. 약을 빻고 약을 달이고 환약을 만들 때 사용했던 기구와 자료들이 꼼꼼하게 소개돼 있다. 조상들의 지혜와 정성, 무병장수의 꿈이 깃들어 있다. 침술과 뜸술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다니, 생명에 대한 인간의 염원은 불멸이다. 지금 과학문명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를 이끄는 것도 조상들의 지혜와 진한 땀방울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독의약박물관 내 특별전 ‘약장 이야기’
한독의약박물관 내 특별전 ‘약장 이야기’

내친김에 오늘은 박물관 기행이다. 발길을 감곡의 철박물관으로 옮겼다. 2000년에 개관한 철박물관은 드넓은 정원에 말끔한 박물관 건물이 돋보인다. 철의 역사에서부터 철을 만드는 과정, 생활속의 철, 철의 재활용, 철과 예술 등 다채로운 철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 차갑고 거칠며 무겁기만 한 물성이 일상으로 들어오면 문명의 도구로, 문화의 마디로, 삶의 향기로 가득하다.

인류가 꿈꾸는 세상에는 언제나 철이 있다. 철 위를 거닐고, 철에 기대어 또 철 속에 머물며 살고 있지 않던가. 때로는 전쟁과 살인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아름답게 가꾸며 하나되게 한다. 그래서 철은 가장 뜨거운 곳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으로 태어나 가장 오랜 역사를 만들고 가장 값진 삶을 일군다. 특히 충북은 철기문화가 그 어느 고장보다 발달했다.

철모르는 사람은 어서 오라. 철들러 가자. 철들어야 사람이 된다. 사람 냄새가 난다. 인류의 진화도 철을 발견하고, 철을 이용해 수많은 문명의 도구를 만들면서 가능하지 않았던가. 철 따라, 철과 함께, 철의 세상을 만나자. 차가운 물성, 단단하고 경직된 그것이 부드럽게 빛난다. 철 이야기를 따라 자박자박 걸어보자. 철의 역사, 철의 문화, 철의 예술…. 철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내 몸은 철들어 있을 것이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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