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충북도청공보관실 주무관

최재봉  충북도청공보관실 주무관
최재봉 충북도청공보관실 주무관

 

(동양일보) 한 톨의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 햇빛과 바람, 공기와 물이 필요하듯 사람도 온전하게 자라고 성숙해지기 위해 수많은 ‘인연(因緣)’이 필요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결코 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었다.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많은 인연이 있었기에 때로는 위로와 용기를, 그리고 희망을 품고 인생의 꿈을 꿀 수 있었다.

인연이란 단어는 본래 불교용어로 ‘인(因)’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 즉 씨앗을 의미하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고 약하기만 했던 나란 존재,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랄 수 있게 도와준 고맙고 소중한 인연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여러 인연들 속에서도 각별하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연이 있다. 배우, 뮤지컬 연출가, 대학교수에서 지금은 바리스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 ‘진상우 감독님’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 ‘연극’에 대한 관심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뮤지컬 출연에 지원했는데 그때 그 뮤지컬을 연출한 감독님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진 감독님은 서울예술단 출신의 능력 있는 배우로 시작해 연출과 감독으로까지 종횡무진하며 연극과 뮤지컬계에서 인정 받아왔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쓰기도 했다. 감독님의 아내 분 역시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지역에서 제자들을 양성하시는 예술인 부부다. 이분들과 연을 맺게 되면서 나의 대학시절은 충만해졌다. 연기와 한국무용, 탭댄스 등을 배우며 예술적인 역량을 키울 수 있던 것 외에도 이분들의 품성을 보고 배우며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학 재학 중 방송사의 리포터 활동 기회를 얻게 된 것도 그런 가능성을 봐주셨던 것도 감독님 덕분이었다. 때론 엄하게, 때론 다정하게 지도해주실 때면 스승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고 활동적이었던 감독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갑작스레 심장에 문제가 온 것이다. 수술을 받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몇 번의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고가며 힘겨운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후유증으로 감독님에게는 언어장애가 찾아 왔다. 연기를 위해 무대에 서고, 교육을 위해 강단에 서는 감독님에게는 치명적이고 가혹한 후유증이었다.

몇 차례의 고비를 보낸 감독님을 문병하기 위해 병실에 들어섰는데 언어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병실 벽면에 붙여놓은 종이가 눈에 띄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의 가사를 써 붙여 놓으신 거였다. “지금 이 순간 / 지금 여기 /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감독님 마음이 저러하실까. 숨죽여 울었다.

감독님은 언어장애 때문에 지인 분들을 뵙기를 꺼려하셨다고 한다. 아마 두려움이 크셨을 것이다. 감독님이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수술 이후 5년만의 일이었다. 바리스타 공부를 시작했고, 지난해 카페를 개업했다.

무섭고 두렵지만 도전하고 기어이 해내는 모습을 보며 제자로서 뿌듯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감독님은 또 다른 무대에서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 감독님의 도전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처음 감독님과 만났던 그때 감독님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그 시절 감독님이 내게 조건 없이 베풀었던 은혜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소중한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나 또한 누군가의 열정을 지지해주고, 꿈을 꿀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인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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