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소요 와중에서의 조선 산업



●병합후의 산업상태

▷마츠무라 “병합 이래 10년 총독부와 민간업자의 노력이 서로 융합해 조선의 산업은 현저하게 개선·진보했고, 결국 그 열매를 맺게 됐습니다. 생산액에서나, 산업에 대한 일반 민중의 사고방식에서나 그 면모가 일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즉 각종 생산물의 총액이 1907년에 약 3000억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17억6000만 원으로 증가했고, 개항 후 무역액은 1910년에는 5900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5억여만 원에 달했습니다. 이는 물가의 등귀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만 생산량의 증가에도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산업의 실상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아직도 지극히 유치한 상황이고, 무한히 매장되어 있는 자원은 앞으로의 개발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조선 산업의 주축인 농업 분야만 보더라도 1910년에는 총생산액이 2억4000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13억8000만 원으로 생산액 면에서 많은 향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종법(耕種法)에 있어서는 아직도 많은 개량을 필요로 하고 있고, 대종을 이루고 있는 쌀 작황에 있어서는 수리 관개설비를 거의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일 뿐 아니라, 하물며 개간 간척 사업 같은 대규모 사업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임업생산액은 1910년에는 1900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3000여만 원으로 증가했고, 조림 면적도 1910년 이후 1919년까지의 10개년에 걸쳐 약 26만 정보에 이르렀지만, 국토 총면적 1600만 정보의 7할에 해당하는 임야 중 미립목지(未立木地)가 약 300만 정보나 되어 지극히 산림이 황폐한 상태이고 치수 및 기타 산업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수산업 분야의 생산액은 1911년에 900여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7100여만 원에까지 달하게 되었으나 어로·양식·제조 등의 분야는 아직도 매우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어장의 개척 또한 등한시한 결과 1919년에 보유하고 있는 발동기 어선수가 10척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 해안선 길이의 3%나 되는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고, 또 일본해나 황해와 같은 유망한 어장을 끼고 있으면서도 어획고는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광업 생산액은 1910년에 생산액 6000여만 원에서 1919년 2500여만 원으로 증가했으나 금·철·석탄 등을 비롯하여 일본에서는 전혀 나지 않는 흑연과 기타 광물의 부존 량이 많은 실정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너무나도 빈약한 상태입니다.

공업 생산액은 1911년의 생산액이 3000여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2억6000여만 원으로 격증했습니다만 산업발달로 인해 원료가 증산되었고, 노동력이 풍부한 반면, 임금이 비교적 낮음에도 불구하고, 공업품의 수입액은 거액에 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 개발상 무엇보다 긴밀한 관계를 갖는 금융·교통·통신과 같은 분야는 옛날에 비한다면 참으로 눈부시게 많이 변화했다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금융 면을 보면 1910년에 각 은행을 비롯한 동양척식회사 등의 대부 액은 3800여만 원이었는데, 1919년에는 3억400여만 원이 늘었고, 예금액은 1910년에 1800여만 원이던 것이 1919년에 1억2500만 원으로 증가했던 것입니다.

병합 전에는 도로다운 도로라고는 겨우 208리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병합 후 두 번의 치도(治道)계획을 실시한 결과 1922년 말에는 주요 1, 2등 도로 55선 1,163리의 축도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철도의 경우, 1910년 말에는 국유·사설을 합하여 1096㎞밖에 안 되던 것이 1920년도 말에는 2171㎞로 연장되었습니다. 그 외 항만 설비, 통신망의 보급 등 현저한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있어 적극적이고도 진정한 대규모의 개발은 지금부터의 과제인 만큼,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도 진정한 대규모의 개발은 지금부터의 과제인 만큼,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각오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를 산업 진흥에 필요한 필수적인 제 요인으로 삼고 추진해 간다면, 안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개발 10개년 계획의 제 1기를 보내면서, 총생산액을 약 6배로 늘리고 피폐곤비(疲弊困憊)가 극에 달해 있던 조선경제를 소생시켰던 여러분들의 위대한 공적을 마음속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을 가져온 산업 방침 및 시설·방법을 상세히 검토하여 새로운 방침을 수립하고, 취사선택을 잘 하기 위해 제 1기의 계획을 참고로 삼아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제 1기의 권업 방침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그 중심을 농업에 두어 식량 증산에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민중의 생활난을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장려 지도는 간단명료함을 주지의 사항으로 하여 복잡다기한 것을 피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부터 철저히 이행했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민지(民智)·민도(民度)가 낮았던 당시에 가장 적절 유효한 방침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결과로 나타난 성적을 보아도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경과했고, 민지·민도가 과거 10년 전과 같지 않으며, 거기에다가 시세의 변천 또한 심하여 구주대전(歐洲大戰 :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사상·정치 등이 심하게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방침을 세울 필요가 중요한 임무로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산업조사위원회

▷마츠무라 “세상의 인심이 소연하여 산업을 뒤돌아 볼 여유가 없을 때, 이미 식산 국에서는 산업 개발의 근본 방침을 수립하기 위해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니시무라(西村)식산 국장은 제도 개정 시, 사이다마현(埼玉縣) 지사로 재직하다가 조선총독부 정치에 참가하게 된 전형적인 관리였습니다. 그의 숙련된 사무적 수완과 치밀하고 계획적인 두뇌와 다년간에 걸친 풍부한 경험이 시노하라(條原), 다나카(田中), 구로키(黑木), 오카자키(岡埼)씨 등 뛰어난 인재들을 만남으로써 조선 산업의 각 분야에 걸친 자세하고 치밀한 조사 연구를 추진할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획기적인 대 방침 안을 작성하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술회에 의하면 이 일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연구 자료의 불비, 특히 제산업 통계가 신뢰하기 어려웠던 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산업장려를 위해 총독부가 각 도·군·부·면에 할당한 수치 그 자체가 통계의 표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행정 당국자에게 문책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작성 보고한 자료로서의 성격이 강하여 실제로 일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하는 조사 자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자료를 모집하고 통계 자료에 시정을 가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과 각자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개안에 개안을 거듭한 끝에 다시 제도를 개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착수 후 약 2개년이 지나서야 겨우 사무당국의 복안이 완성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있었던 니시무라 국장을 비롯한 당국자의 숨겨진 고심과 노력은 외간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의 방침이 결정되었고, 드디어 1921년 5월 31일 산업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널리 조선 및 일본 산업계의 유력자 및 학식 있는 자를 위원으로 위촉했고, 동년 9월 15일부터 5일간 총독부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본회를 설치한 취지는 당시 사이토 총독의 다음 연설 내용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산업조사위원회 설치와 관련한 사이토 총독의 연설

‘산업을 진흥하고 민중의 복리를 증진 시키는 것은 조선통치의 요체로 선임자들도 일찍부터 이 뜻을 가지고 주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추진해 준 덕분에, 그 성적이 현저히 나아졌음은 내외가 널리 인정하는 바입니다. 불초소생이 대명을 받아 조선에 부임해 온 즉시 그 진보의 원인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고, 이를 알고 난 후 선임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던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오로지 일념으로 한일합병의 본지(本旨)를 골자로 하여 조선 경제력이 더욱 발전하고 민중생활이 향상될 수 있도록 제반계획 시설을 계획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비용 문제도 있고, 또한 사업이 매우 중차대하다는 것을 재삼 인식하여, 신중히 연구조사를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산업은 국운 성쇠와 연결되는 것으로 그 관계되는 영역이 매우 넓고, 또 설치해야 할 설비 또한 복잡다기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움직임을 보고 자체 내에서 임기응변적 조치를 강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대략적인 방침을 정한 후, 이것이 관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분명히 하여 제반시설의 맥락과 계통을 세우는 것이 총독부 내 전국(全局)의 업무가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데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정 이래 이미 10년의 경험을 축적한 지금, 조선 산업의 추세도 대략 알 수 있게 되었으므로 앞으로는 기본이 될 만한 일정한 방침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합치하는 것이고, 더욱이 나아가서는 시대의 추세에 순응하여 병합의 본의를 발양(發揚)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산업의 발달은 주로 민간업자의 계획, 추진, 경영에 의해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민간 업자들의 계획, 경영 등이 정부 방침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이는 견실한 산업의 발달을 저해하는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력의 진전에 누를 끼치는 일까지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업에 관한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반드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주요한 일인 바, 특별히 산업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야에 유식한 인사를 널리 초청하여 심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심의를 필요로 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친히 위원장께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 각자에게 잘 알려서 알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부디 본인의 취지를 잘 이해하시어 신중하게 심의해 주실 것을 거듭 부탁드립니다. 또한 조선의 산업개발에 필요하고 적절한 안을 만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산업조사위원회 결의서(조선 산업에 관한 일반적 방침)

조선에서의 산업계획은 일본제국의 산업정책 및 방침에 모순됨이 없이 계획되어져야 할 것이고, 내외 정세 특히 일본・중국 및 러시아령 아시아 등과 인접 지방의 경제 사정을 고려한 후 그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음.

조선 사업은 시정 이래 그 진보는 필경 초창기의 미약한 산업 상태로부터의 진보로, 그 기초가 극히 약하고 발전의 요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여서 장래에는 더욱 더 많은 지식과 기능을 향상 발달시킬 것이 요구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근면 협동의 관습을 조장하고 산업 제반의 조직 및 교통・통신기관을 정비하고, 자력의 충실 및 금융의 융통을 꾀하며,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연락을 더욱 밀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조선 경제력을 강화시키고, 내선(內鮮) 공동의 복리를 증진 시켜야 할 것임.

조선 산업에 관한 제반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일본과 인접한 지역과의 관계, 조선 내부의 사정 및 재정상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그 규모를 정해야 할 것이고, 경중을 비교 측정한 후, 빨리할 일과 늦게 할 일을 가려서 추진할 필요가 있음(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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