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231년 몽고군 4만 명이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의 군관민(軍官民)은 귀주성에서 몽고군을 맞아, 200년 전 강감찬이 군관민과 더불어 10만의 오랑캐를 물리친 귀주대첩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5천의 병력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몽고군은 대형 발석기 15량으로 성루를 향해 포격을 가해왔다. 고려군도 이에 맞서 포차로 바윗돌을 몽고군을 향해 날린다. 몽고군은 장수가 돌에 맞아 머리통이 날아가자 군대를 뒤로 물린다. 9월 들어 다섯 차례나 공세를 퍼 부었으나 성을 넘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12월 하순 경 몽고군 총사령관 살레타이가 직접 귀주성 앞에 나타난다. 운제(雲梯 )을 4면의 성벽에 수십 개 걸치고 몽고군이 오르자, 커다란 칼인 대우포(大于捕)가 기다리고 있다가 사다리에 붙어 오르는 몽고군을 무자르듯 베어 내린다. 석포로 몽고군의 머리를 내리치고 궁시로 가슴을 뚫는다. 어디 이뿐이랴 날쌘 장병들이 성 밖으로 달려 나가니, 당황한 몽고군의 목이 낙엽처럼 우수수 땅에 떨어진다.

1차 대몽전쟁은 1231년 시작되어 1234년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2차부터는 궁성을 강화도로 옮기며 항몽정책 기조를 유지한다. 서해 수로를 활용하여 세수를 조달 받으며 군사조직을 가동하면서 세계 최대 강국 몽고제국과 40년 동안 전쟁을 계속한다. 그렇다면 그 전쟁수행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고려의 군관민 특히 민의 정신과 세계최고의 조선술 인프라가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양반 별초와 관노비로 구성된 노군 (奴軍) 그리고 관의 잡일꾼인 잡류군(雜類軍)등의 세 부대가 충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몽고군이 충주에 입성하자, 별초 대장 충주부사 우종주와 양반 별초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노군과 잡군의 지휘관 유홍익조차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전투 경험도 없는 노비들과 잡류들은 당황하지 않고 지휘관을 뽑아 방어 전략을 짜서 세계 최강 몽고군을 물리친다. 이런 전투는 세계 전사에 보고된 바 없다. 또한 동선령 전투에서는 군관민뿐만 아니라 산적 (賊)까지도 합류하여 몽고군을 폐퇴시키는 일까지 벌어진다. 민(民)은 곧 국가이다.

고려 고종은 몽고의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화친하고자 하였다. 최씨 정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자를 쿠빌라이에게 보내 무릎을 꿇게 하였다. 고려왕실의 생각은 왕권회복 쪽에 방점이 찍고 있던 터였다. 남송 정복이 쉽지 않아 고심하고 있던 후빌라이는 가뭄 끝에 맞는 단비처럼 이 소식을 반가워하였다.“당나라도 깨뜨리지 못한 고려(고구려)가 나에게 항복하다니…”하며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화의를 맺고 돌아와 왕위에 오른 원종은 왕실의 짐을 꾸려 개경으로 돌아온다. 강화도의 왕궁의 문을 닫고 회궁한다는 것은 곧 40년의 항몽시대를 접는다는 뜻이 된다.

삼별초는 1271년 5월 15일 지도부를 제주도로 옮기지만 1273년 4월 28일 여원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1274년 5월 11일 태자가 원나라 세조의 16세 공주과 혼인하여 원의 부마국이 되어 국가의 주권을 실같이 유지한다.

원의 후빌라이는 일본 정복을 위해 정동행성을 세우고 충렬왕을 수장으로 임명한 후, 일본 정복을 위해 우선 군선 건조를 명령한다. 고려의 배신자 홍다구는 몽고의 장군이 되어 900척의 배를 최 단기간에 만들기 위해 고려 군민들을 포악하게 다룬다. 홍다구의 무자비한 채찍질 아래 죽거나 살았으나 매질 자국이 썩어가는 비참함을 견뎌내야 했다. 고려인 3천 5백 명이 동원되어 불과 4개월만 900척의 전선이 건조된다. 세계 최고의 고려 조선술의 인프라가 몽고의 일본 정복 꿈을 위해 참혹하게 동원된 것이다. 당시 일본 가마쿠라 초기의 막부 우두머리였던 호조 도키무네는 쿠빌라이의 항복권유를 어린 나이답지 않게 단호하게 거절하고 몽골 사신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 이즈음 충렬왕은 전라도 장흥 조선소에 내려와 전선 만드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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