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 괴테가 그랬다고 한다 ‘부드러운 것,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역사에서 주로 남성들이 일으킨 전쟁이 구원일 리 없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계승하던 신분제도가 해방일 수 없다. 전쟁이란 이겨도 수많은 누군가가 죽어나가야 하고, 신분제도는 항상 더 고귀한 누군가에게 예속되는 법, 역사에서 통칭 남성적인 무슨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벌인 전쟁은 파괴를 전제로 한다는 불가피함이 있다. 그래도 괴테는 철학적으로 쓰이던 독일말을 연애 이야기로 사용하고 여성을 좋게 보아준 옛날 사람이다. 인간에게 있어야 하는 것, 친절함과 따듯함에 대한 선망. 여성을 짐승과 남성의 중간으로 모독하던 이도 있고, 삼일에 한 번은 명태처럼 두들겨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던 문화도 있는데 사랑할 대상을 넘어 구원의 차원을 여성과 연관지은 것은 놀랍다.

괴테와 독일을 선망하던 친구를 곧 만난다. 명절을 앞에 두면 모든 행차가 번잡스러운데도 만나자는 말에 엄두를 냈다. 친구로 사귀어온 삼십 년 세월의 습관일 것이다. 그러니 세월은 힘이 세다. 늘 그렇듯 조근조근하게 쌀을 담근다고, 떡집에서 가래떡을 뽑자고, 나누자는 권유도 은근했다. 조용한 배려의 마음도 이 친구와 오래 만나는 데는 한 몫을 했을까. 고집 부리지 않고, 지적하지 않고, 묻고 살피는 태도와 함께. 별 싫증 모르고 엄청난 이해에 얽혀 힘들게 하는 일 없이 친구려니 함께 건너 온 시간들이 새삼 고맙다. 대학에 입학하고 만난 그 친구는 햇살 좋은 오후 교문 앞에서 ‘이히 리베 디히’로 시작하는 노래를 한글로 적어 가르쳐 주었더랬다. 처음 배우는 독일 노래는 성악의 장엄함이 아니라 또래의 친근함 덕에 전달되어 그 먼 나라까지도 문문하게 만들었다고 할지.

누군가를 만나 친구가 되는 일은 연인이 되는 일보다 쉬울까. 사람이 타인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나누고 아깝지 않은 순간들은 사실 기적같다. 누구를 만나 사귀고, 염려하고, 함께 기뻐해주는 시간과 공간과 정서의 확장은 신기한 일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게 있다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일, 인간의 대책없는 성품이 잠시 그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변신을 하는 것인지. 하여 우정, 사랑, 그리움, 희망 같은 것들을 품게 되면 무기력으로 주저앉을 일상에 기적을 선물한다. 확장의 역사가 비롯되는 것이다. 경험도 기억도 기대도 그 순간에는 교유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는 기적, 이해관계 없는 공감이 가능한 짜릿한 순간이 펼쳐진다.

친구라는 관계는 이항대립의 사고로 본다면 매개항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완전 가까운 혈족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확대된 타인이며, 완전히 먼 미지의 사람과 나서서 섞이는 안내자이다. 흑백의 단순하고 명료한 관계에 확대와 혼종의 회식지대를 만드는 것, 햇살만 난무하는 뜨거운 여름철 나무그늘 같은 공간이 생겨나는 것, 완전히 동일해지지 않으면서 공통의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친구관계일지 모른다.

틈만 나면 구원처럼 소리 높여 노래를 하던 시절 김민기의 ‘친구’도 우리가 함께 불렀을까, 시간, 역사, 질문, 대답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던 짙은 노랫말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아른 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얼굴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라던.

박자도 음정도 정확한데 읊조림 같던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 기억되어 달리는 기차바퀴를 떠올리게 하고는 했는데.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이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역사의 은유로 묻던 질문을 그쳤을까. 떠오는 모습과 들리는 음성으로만 곁에 있는 친구와 수많은 얼굴들, 홀로 일어나 말할 사람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친구를 만나면 들어봐도 좋을지, 괴테 할배와 독일은 지금 친구에게 어떤 의미인지. 1월은 다 갔어도 아직 새해라는 서슬은 퍼렇다. 무엇을 묻고 어떻게 더듬어 가야하는지 순전한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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