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생 때 극장간판 그리다 이젠 유명 조각가로 우뚝

정관 김복진 묘소 찾고, 화랑 김유신·윤봉길 의사·포석 조명희·부재 이상설 동상 제작

“독립군처럼 살아왔다”… 이젠 교수직도 버리고 ‘자유인’으로 장인의 혼 불살라 작품 만들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년의 꿈은 화가였다.

중학생이 되고고등학생이되었어도가난을떨쳐내지못하자‘학비도벌고, 그림도 그리는 일’ 은 읍내극장의간판 그리는 일이 유일했다. 용돈을 아껴수채화물감을사러갔던청주의한 화방에서 만난 화가에게서 “간판그림으로는 화가가 될수 없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미술대학에 진학, 조각을전공하는미술 교사-교수-전업조각가로변신한정창훈(64) 작가의입지전적생애.

새해에 들어서자마자동양일보문화기획단이 마련한 일본최초의사립미술관인오하라미술관(오카야마현구라시키시)과 세계의 명소가 된 예술의 섬나오시마의지중미술관관람단원으로DBS크루즈훼리를타고 3박4일간 정작가와함께 하면서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리고 조각가로 남은생애를어떻게계획하는가를들어 보았다.



-반갑습니다. 더구나 예술기행 길에서 한 배를 타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 ‘예술의 섬’이라 불리는 나오시마는 이미 다녀 오셨었지요?

“예. 이번이 세 번째 방문입니다. 이렇게 추운 때, 더구나 크루즈로는 처음입니다. 나오시마를 가는 분위기가 항공편 보다 훨씬 좋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정 작가가 청주 세광중·고 미술교사 시절, 미술협회 회원전시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때 출품한 정 작가의 조각 작품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1980년대였습니다. ROTC로 군에서 제대하고 미술교사로 출발했지요. 대학에서 전공한 조각에 정열을 쏟아 밤낮없이 작품을 하던 때였습니다. 회장님은 당시 청주에 몇 명되지 않는 시인이자 연합통신 기자였는데 당시 보나르 화방을 중심으로 화단을 이루던 서양화가 안승각·정진국·정해일·왕철수·이구민, 한국화가 이석구·박영대 화백들과 도예가 임상묵 교수(충북대)님들과 자주 어울리셨지요. 그 분들이 모두 제게는 은사 격이어서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들이셨지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한 분 한 분이 참 대단한 분들이셨습니다.”

-그 중심에 충청일보 문화부장이자 보나르화방을 운영하시던 우영(1937~2012)선생이 계셨지요.

“저는 그 분 때문에 대학에서 미술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뒤에 자세한 설명을 하겠지만 제 생애에 잊을 수 없는 한 분이지요.”

-미술에 대한 소질은 언제 발견됐는지요.

“진천군 덕산면에서 출생한 저는 한천초등학교를 다녀요. 2학년 때 담임 권순원(76·현 청주시 서원구 청남로2005번길 45. 201동 306호) 선생님이 미술시간에 그린 제 그림을 보시더니 “참으로 특별하구나. 너는 화가도 될 수 있어”라며 극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교실 뒷벽 게시판에 붙여놓으셨어요. 아이들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선택된 그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19세 처녀 선생님으로 첫 부임지에서 맡은 학급의 한 어린이에게 ‘화가도 될 수 있어’라는 확신에 찬 그 한마디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저를 지켜낼 수 있게 한 이 한마디가 제 인생을 오늘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권 선생님이 안수길 소설가의 부인인 것은 아셨습니까?

“미술교사 시절에 알았습니다. 제 근무처인 세광중·고 인근의 교동초에 근무하실 때 찾아뵙고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권 선생님은 정년퇴임 하실 때까지 참 훌륭한 교육자셨다고 들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시거나 지진아를 우등생으로 만드셨다는 등의 사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중·고교 시절은 어떻게 지냈는지요.

“진천중학교로 진학 하고 미술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돈을 벌어야하는데 그림과 관련이 있는 곳이 있었어요. 진천극장 간판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극장 한구석에서 영화 프로가 바뀔 적마다 새로운 간판을 그려야하는데 심부름도 하고 조수 노릇도 하면서 지냈어요. 진천농고로 진학하면서는 학교공부 보다는 거의 간판 그리는 일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용돈이 생기면 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청주 보나르 화방에 가서 붓과 물감을 구입하는데 그곳에서 뵙는 어른들이 모두 화가라는 것을 알고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머뭇거리며 ‘화가 구경’을 하다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그때 서양화가 정진국 선생님이 무엇을 하느냐기에 진천에서 극장 간판을 그린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더니 “간판 그림으로는 화가가 되지 않으니 화실로 오라” 하여 가장 기초가 되는 목탄 크로키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설된 충북대 사범대 교육학과(미술교육전공)를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진천농고에서 예비고사 합격자 3명중 하나였어요. 입학하면서 조각가 김수현 교수의 조교로 있으면서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서양화도 했지요? 그후 조각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도에 저는 육군 중위로 있을 때 국군미술대전에 출품한 서양화가 최고상(국방부장관상)을 받습니다. 바로 그 해에 국전에 출품한 조각 작품이 입선하고, 이듬해엔 조각 ‘여인상’으로 목우회장상을 탑니다. 충북도전에서 조각으로 최고상도 받지요. 84년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아내를 모델로한 조각 ‘심원’이 특선을 하는데, 이는 지방대 출신으로는 첫 특선이어서 전국 지방대 출신 미술인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극장 간판을 그린 것이 밑거름이 되어서인지 회화도 인정을 받았지요. 그러나 조각가로 매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재직했던 충북보건과학대(전 주성대) 교수직을 내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해 8월에 사직을 했습니다. 1998년에 들어가서 꼭 20년간 근무했던 강단을 떠났습니다. 명예퇴직을 한 것이지요. 울산·인천·남양주 등 전국 지자체에서 주문 받은 조형물들을 제작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한데다 이제는 자유인이 되어서 하고 싶었던 작품을 하려고 합니다.”

-오래된 일이지만, 한국의 미켈란제로라 일컫는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1901~1940. 청주시 남이면 팔봉리 출생) 선생의 묘를 찾느라 팔봉산자락을 누비던 모습이며, 근대문화의 선각자 동상제작에 정열을 불태우던 모습들 등 남다른 작가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같은 일관된 역사의식의 형성은 언제부터였는지요.

“저는 끊임없이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살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선인들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며 위안도 받고 부족한 점을 깨우치기도 합니다. 자신있게 말하건데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조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정신으로, 장인匠人의 흔적을 남기려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역사·문화의 한 점으로 남고자 합니다. 정관 김복진 선생의 묘소 찾기 작업은 어쩌면 저의 숙명적인 의무였습니다. 이 지역출신으로 ‘한국 근대조각의 아버지’라 일컫는 정관 김복진 선생의 묘역을 찾아내야한다는 무거운 책무는 후배 조각가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소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 1회 정관 김복진추모미술제를 2008년까지 매년 가져오다 지금은 흐지부지 된 듯합니다. 정 작가와 뒷목문학회가 묘소를 찾은 이후 동양일보와 청주미술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해오던 행사였지요. 미협 회장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관심의 무게가 달라지더군요.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하는데 예술단체 행사주최자들의 의식구조가 이해하기 힘든 게 많습니다. 가령 조형물을 세우는데도 작가에게 맡겨서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되어야 마땅한데도 단체장들이나 재정 후원자의 아집이나 편견을 넣도록 하려는 안타까움이 아직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은 얼마나 됩니까?

“대형 조형물만 전국에 150점 정도 됩니다. 윤봉길 의사 동상·화랑 김유신 동상 등 역사적인 인물들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

-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에 세워진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1894~1938) 선생의 동상 포즈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세워지는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의 동상 포즈도 특별하지요?(이상설 선생의 호를 일반적으로 ‘보재’로 표기하지만, ‘부재’가 적확한 표기임)

“제가 진천 출신인데 마침 동향의 포석 선생의 동상을 맡게 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 근대문학의선구자요 시인이자 소설가요 희곡작가이기도 한 국민작가를 어떻게 한 모습으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최초의 망명 작가로 러시아 땅에서 한글문학과 역사를 가르치며 문학과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포석 선생의 불꽃같은 44년 생애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와 꿈에도 못 잊을 고향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로 많은 날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맨발에 두루마기를 날리며 조선인들에게 조선독립을 외치는 역동적인 모습을 형상화 했지요. 부재 이상설 선생은 옛 만주 땅이던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서전서숙이라는 조선족 신식학교를 처음 세운 선각자셨지요. 지금도 용정초 운동장 한 쪽에 서전서숙 표지석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진천 혁신도시에 서전고가 개교되고 지난 해 부재 선생의 동상을 교정에 세워달라는 주문이 들어 왔어요. 포석 선생이나 부재 선생 모두 진천 출신이어서 제게는 고향 어른들이고 역사적으로는 근대한국의 선각자들이어서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동상을 제작하여야한다는 압박이 컸습니다. 그래서 부재 선생은 두루마기를 벗은 조선남자들의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앉은 자세로 고종황제의 칙서를 읽고 있는 모습을 담았지요. 현재 작업은 끝난 상태입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인奇人이거나 기벽奇癖이 있다는 말을 듣지는 않나요?

“저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이 말하는 빽 없고 돈이 없지만 기죽어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큰 욕심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이제까지 많은 조형물을 제작했지만 언제나 제작비의 10%만 내 것이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배운 것에 대한 실천자가 되어야겠다는 신념엔 변함이 없습니다. 더러 상처를 받을 땐 침묵으로 일관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치유가 돼요. 오해를 했다면 풀어지고 모함을 했다면 벗겨지지요.”

-좌우명이라면…

“‘늘 생각하고 늘 움직여라’고 뇌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다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늘 생각하고 늘 움직여라는 자신에 대한 주문은 자신을 자연스럽게 사색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지요.

“한마디로 하면 꼭 독립군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남들과 더불어는 살지만 예술인이 지녀야하는 진·선·미의 감각과 아름다운 욕심의 불티를 보존해야하는 남다른 세계를 끌어안고 가야하지요. 솔직하게 표현하면, 노예처럼 노동하고 황제처럼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독립군들이 음습한 곳에서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조국 광복의 감격을 위해 초개草介처럼 자신을 던지는 위대함이 밤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몸이 고생을 하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손으로 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앞에서 우영 선생에 관한 숨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요.

“제가 고등학교 때 청주에 나와 그림 그릴 재료를 사러 다닌 곳이 보나르 화방이었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충북대 미술과를 다니게 되었다는 소식에 우영 선생님이 그림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는 다 대줄테니 걱정 말고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시골에서 유학 온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하느님의 복음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고마워서 시간 나는 대로 보나르에 가서 주문받은 액자도 만들고 심부름도 하면서 고마움에 보답하려 했지요. 4년간 제가 가져다 쓴 미술재료 값을 모두 합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것입니다. 돌아다보면 저를 키워준 분들은 부모님을 빼고도 두 손의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계시지요. 진천농고 때의 전원표 교장선생님은 (극장 간판을 그리는)‘펭끼쟁이’ 학생인 저에게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분이고, 정진국 선생님은 세광중·고 미술교사로 저를 끌어 주신 분이지요. 그래서 함부로 허투루 살 수가 없습니다.”

-전국의 사찰을 자주 다닌다고 들었는데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늘 생각하고 움직이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여행을 많이 하는데 그 중 사찰을 찾는 일이 많은 편입니다. 불교의 깊은 이치와 기독교의 사랑과 헌신의 정신도 삶의 균형을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가족관계는…

“28세 때 대학 같은 학과 후배(김재원·61·전 중고교 교사)와 결혼했고, 아들(지황·36) 하나가 있습니다.”

-남겨놓고 싶은 말이나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시류 따라 움직이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이 시류에 휩쓸리다보면 자기 것은 사라질 것이지요. 제 꿈은 거대한 산을 하나 갖는 것입니다. 욕심이겠지만 한국의 한 복판쯤 되는 위치에 1만평 쯤 되는 크기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만한 면적에 큰 바위가 있었으면 해요. 그래서 그 곳을 조각하면 거대한 작품 하나가 탄생할 것입니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꿈을 조화시키면 분명 훌륭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략 위치 정도는 보아둔 곳이 있는지요.

“한 곳이 있습니다. 조금 작은 듯싶어 주변을 사들여야 하는 등 신경을 써야하는 게 흠입니다만. 기대해 주십시오. 오래지 않아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 거대한 작품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겠습니다.”

매주 수요일 게재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정창훈鄭昌薰 조각가는…
* 1955년 9월 20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옥동리 출생
* 진천 덕산 한천초-진천중-진천농고 졸
* 충북대 사범대 미술교육과 졸-홍익대 대학원(조각전공)졸
* 청주 세광중·고 미술교사-충북보건과학대 교수

<수상>
* 1980년 대한민국국군미술대전 최우수상
* 1984년 대한님국미술대전 특선(조각)
* 1981년,1984년 목우회공모전 목우회장상
* 1984년 충북예술상 수상
* 1986년 서울현대조각공모전 특선
* 1990년 청년작가상


<초대 개인전>
* 시드니국제아트페어(2006) * 타이페이국제아트페어(2006)
* 중국국제미술관박람회전(2004.2005)
* MEDI 아트 갤러리(파리)1996
* 루치아갤러리(뉴욕)1989
* 현대미술관(서울)1986. 1990 외 21회
* 주소 : 충북 진천군 진천읍 보련골길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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