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낯선 단어를 내놓았다. 그날 대법원은 모 대학교수 해임소송을 파기환송 했다. 여학생들을 뒤에서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교수의 복직을 결정한 2심이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성인지 감수성은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민감성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남자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비하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섬세하게 가려내는 것을 뜻한다.

서지현 검사가 지난해 검찰 내부의 성희롱 피해 사실을 올리면서 '미투'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새해 들어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가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다. 빙상계에서 다른 피해사례가 이어졌고, 유도·태권도에서도 폭로가 나왔다.

정부와 대한체육회가 초기 대책을 내놓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약했다. 가해자를 영구제명하거나 국외 활동을 막는 것은 사후약방문이다. 전수 조사를 하거나 신고센터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엘리트 체육을 손보는 것이다.

엘리트 체육이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게 됐다. 어린 선수가 또래와 단절된 채 대표팀 선발과 상급학교 진학까지 지도자의 권력에 매달리고 줄을 서게 되는 시스템은 폐기할 때가 됐다. 남자 지도자의 방을 여자 선수가 청소까지 하는 체육계의 합숙, 성적(性的) 수치심까지 참아내도록 하는 훈련이 말이 되나. 이런 관행은 일반적인 성인지 감수성으로는 용납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체육계 가해자들은 시간이 흐른 일이고, 증거도 없다는 점을 무기 삼아 끝까지 발뺌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어떤 답을 얻을지 걱정된다.

물론 피해자 주장에만 의존해 무죄 추정의 원칙을 버리자는 뜻은 아니다. 법과 증거로 판단하되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수사와 재판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해 미투가 이어졌지만, 많은 피해자가 더 큰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 미투 운동 2년 차인 올해는 "나는 걸리지 않을 것" "결국 너만 손해야"라며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들이 대가를 치르는 사례가 많아져야 한다.

검찰과 법원에 ‘성인지 감수성’이 폭넓게 자리잡고 양성평등 실현에 더 가까이 가는 사회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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