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시인

(동양일보) 삼한사온(三寒四溫)이 고장 난 시계가 된지 오래다. 그 자리에 ‘삼한사미(三寒四微)’가 자리를 잡았다. ‘사흘은 춥고 나흘은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이라니 최악의 시스템으로 바뀐 셈이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은 하루 춥고, 하루는 미세먼지라는 일한일미(一寒一微)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기상캐스터의 설명이다.

아침운동을 나가는 사람들도 검은 마스크에 모자까지 꾹꾹 눌러 쓴 복면강도차림으로 날씨변화에 적응하려는 일명 ‘마스크 패션’이 유행이다.

얼마 전 남해 ‘순천만 습지’를 다녀왔다. 오전만 해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싶을 정도로 화창했던 날씨가 오후 들어서자 잔뜩 흐린 날씨로 변했다. 미세먼지 때문이란다. 습지를 살려 생태계를 복원하고, 5.4㎢(160만평)의 갈대밭까지 잘 어우러진, 겨울이면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같은 세계희귀종 철새들이 찾아온다는 이곳에서조차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관광객 모습이 자주 눈에 띄어 씁쓸했다. 8000년 역사가 녹아 든, 끝이 보이지 않는 22.6㎢(690만평)의 광활한 갯벌을 가지고 있는 ‘세계5대 연안습지’, 순천만이 지름10㎛이하(PM 10)인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작 미세먼지 문제를 큰일로 여기지 않는 인식도 ‘큰일’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 중 디젤에서 배출되는 BC(black carbon)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바 있다. ‘1급’이란 암(癌)과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콕 집어서 암을 일으키는 바로 그 물질(113번째 발암물질)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지름이 2.5㎛ 이하(PM 2.5)이면 ‘초미세먼지’로 분류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초미세먼지는 미세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사람의 뇌(腦)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장기에는 없는 자동방호시스템이 가동돼 웬만한 공격에는 손상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허나, 완벽하다고 하는 뇌의 방호시스템도 미세먼지에게 만큼은 쉽게 뚫린다고 한다. 실핏줄을 타고, 머릿속을 파고들며, 피부 속 깊숙이 침투하여 생명까지 위협하는 미세먼지가 더 이상 미세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미세먼지의 폐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심각하다. 예를 들어 반도체와 전자업체, 디스플레이 관련업체 들은 미세먼지로 인한 불량률을 줄이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자동차업계나 조선업계까지도 미세먼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실외에서 장시간 활동해야 근로자들의 건강문제도 예상되는 피해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교통사고도 증가하고, 음식점이나 쇼핑가에도 고객들의 발길이 뜸해져 매출감소로 이어진다고 한다.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는 3대 요소가 공기, 물, 음식이라고 한다면 건강한 먹거리와 깨끗한 물도 관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염 안 된 청량한 공기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대기, 마스크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지구가 이미 코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병은 깊은데 백약이 무효라는 점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저감대책도 미세먼지 만큼이나 미미하기 짝이 없다.

경유차 운행을 제한하고, 수소차를 늘리고, 인공강우도 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중국 발 편서풍을 타고 오는 미세먼지 군단을 저지하기에는 태부족이란 얘기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거대한 우주에 비추어 미세먼지처럼 미세한 인간의 존재가 어쩌다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어 스스로의 생명을 위협받고 있을까.

어쩌겠는가, 1만 원대의 화재감지기만 달았어도 끔찍한 화재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선 미세먼지 ‘매우 나쁨’인 날만이라도 천 원짜리 ‘마스크 패션’에 동참해 보자.

“미세먼지보다 추위가 낫다.“ 올 1월, 역대 급 미세먼지를 겪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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