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 비교적 긴 설 연휴가 끝났다. 북적대던 자식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휑하니 허전한 날이다. 밀린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 와 뜨끈한 찜질방이라도 가고 싶은 날이다. 전통적인 설 풍속도는 많이 변했지만 설은 여전히 설렘이 있고 한동안 여운이 남는 민족의 대명절임에 틀림없다.

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정서가 고향을 찾는 ‘귀성(歸省)’과 가족과의 기분 좋은 ‘만남’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 싶다.

나이 들면서 피붙이들을 가까이 두고 산다는 것, 가족이란 울타리가 주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번 설엔 해외에 거주하던 딸 내외가 아예 귀국을 하게 돼서 며칠 후면 눈에 밟히던 손자, 손녀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맘이 푸근해진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설’이라는 오랜 세시풍속(歲時風俗)도 최근에는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선 제사에 대한 인식이나 부담이 확연히 달라졌다.

설에 제사를 지내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대만, 베트남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 ‘춘절(春節)’의 경우에도 한국과 같은 명절제사는 없고 가족이 함께 모여 새해를 맞는 축제에 가깝다.

‘온 가족이 함께’, 그리고 ‘간편식도 무방’ 하다는 차례 상 준비에 대한 인식이 호응을 얻게 되면서 소위 ‘가정간편식(HMR, Home Meal Replace)’이 제수음식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3040세대를 대상으로 한 식품회사의 ‘명절 제수음식 간편식 소비 트렌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7.5%가 “간편식을 활용하겠다.”고 답했다 한다. ‘정성과 손맛’대신에 ‘편리성과 시간절약’을 택하겠다는 의사표시다. 최소한 엉덩이를 붙이고 허리를 꼬아가면서 '전(煎)'부치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명절증후군’은 훨씬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효율과 편의성을 추구하는 이른바 ‘D세대(delivery세대)’로 통칭되는 ’명절 신(新)인류‘는 그마저도 귀찮아 차례 상을 통째로 배달하는 것을 선호한다.

‘귀포 족(귀성 포기 족)’이나 혼자서 설을 쇠는 ‘혼설 족’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명절날 혼자서 편의점이나 분식집에서 끼니를 때우던 짠한 모습대신에, 이제는 당당히 ‘명절세트’로 설 기분을 만끽하는 신 풍속도를 흔히 볼 수 있다.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 이대로 가면 2035년에는 1인 가구 비중이 34.3%가 될 것이라는 통계청보고가 이런 변화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D턴 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차례만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끼리 여행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이동경로가 알파벳 D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제는 간편식으로 차려진 설 차례를 서둘러 지내고 가족여행을 떠나거나, 아예 여행지에서 배달 상차림으로 차례를 지내고 실속 있게 여가를 즐기는 소위 ‘호캉스(호텔과 바캉스의 합성어)’가 큰 흉이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설 연휴 기간에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85만7000명에 달할 것이라는 국토교통부의 발표도 그리 놀랍지가 않다. 요즘은 명절연휴에 들며나는 여행객들로 공항이 북새통을 이룬다는 뉴스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제사음식을 주문하고, 스마트 폰 영상으로 새해인사를 나누고, 계좌송금으로 용돈이나 세배 돈을 주고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애써 ‘빳빳한 신권‘으로 세뱃돈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변화를 개탄할 필요는 없다.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춰 명절풍속이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부모세대와 개인중심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청년세대가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며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

설 명절이 끝났다. 누구에게는 즐거웠고 누구에게는 분명 불편하기도 했을 설 명절, 이제 명절증후군도 날려버리고 휴식의 달콤함에서도 일어나자. 기해년 새해가 다시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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