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제안원 원장

이기동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제안원 원장

(동양일보) 지난주간은 구정명절로 일가친척을 만나고 한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이야기에 마음한편의 찡한 감정이 올라와 말문을 닫고 감정을 다독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영암으로 시집와서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유복한 삶을 사셨는데, 남편인 외할아버지가 1950년 동족간의 전쟁 때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30세 초에 과부가 되어 억척스럽게 자녀들을 키우며 살아오셨고 형편상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에 대한 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외할머니의 큰딸의 자식인 나는 가정형편상 부모님과 같이 살지 못하고 외할머니와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마을청년들에게 죽창으로 죽임을 당하고 살아온 이야기,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해 굶주렸던 이야기, 큰딸이었던 내 어머니는 일만하다 아무것도 못해주고 시집간 이야기, 대나무 가지에 눈을 다쳤는데도 치료를 제 때 받지 못해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일을 말씀 하실 때는 눈물을 보이시기도 하셨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책 한권으로는 기록하기에 부족할 것 같은 힘겨운 삶의 아픔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늘 하시던 말씀은 ‘공부 열심히 해라’였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엄마와 외삼촌 이모들이 못 배워서 당한 설움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지만 철없는 저는 일부러 늦게까지 놀다 들어가는 반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때도 혼을 내는 꾸중보다는 ‘나는 네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면서 기다려주시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부모의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친 손주들보다도 먼저 챙겨주시고 눈 한번 찡그리시지 않고 온갖 투정을 다 받아 주시던 외할머니.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전하자 한껏 만족한 웃음으로 기쁨을 표하시던 그 외할머니.

곁을 떠나 취업을 하고 결혼하여 찾아뵈었을 때는 나머지 한쪽 눈도 안보이게 되어 얼굴을 더듬으면서 ‘너는 나 살아가는 활력이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이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얼굴을 들지 못하고 훌쩍거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하늘의 부름을 받고 영원히 내 곁을 떠나가셨지만, 지금도 내 귓가에는 ‘너는 나 살아가는 활력이었다고’고 말씀하시던 외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언젠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어머니는 “네 외할머니는 부지런하셨고 늘 손에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고,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고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는데…라며 미안해 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시곤 하셨습니다.

너무 소중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았기에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던 나에게 외할머니는 진실하게 사는 방법을 생활의 현장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번 설 명절엔 외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더욱 그리웠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그 품안이 더욱 생각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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