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국 1등공신… 용비어천가 집필·수양대군 참모

(동양일보)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성공할 자격이 없다. 상처가 없는 곳에는 빛의 통로가 없다. 낮고 느린 곳, 아픔이 깊은 곳에 삶의 향기가 있다. 별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밝게 비춘다. 매화가 아름다운 것은 매서운 추위와 온 몸으로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죽순이 자라 대나무가 되려면 매순간 마디와 마디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새들은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한 일(一)자를 10년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고,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한다. 수묵화는 먹 가는 일부터 수행이다. 목공의 귀재는 새를 깎아 하늘에 띄운다. 열정이 많은 자일수록 방황이 길고 번뇌가 많다. 번뇌가 많을수록 크게 깨닫는다.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 안에서 마음을 관찰해야 정직해진다. 꿀 1kg을 얻기 위해 벌은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 사랑이란 언어가 입속에 든 가장 뜨거운 촛불이다.



봄이 오려는가. 오늘따라 생각이 깊다. 찬바람을 뚫고 음성군 생극으로 달려갔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었던 권근 선생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양촌기념관이 궁금해서다. 이곳에 ‘혼일강리역대국지도’가 있다. 1402년(태종2)에 대사성 권근,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만든 지도인데 조선 최초의 세계지도다. 세계의 지명 130여 개를 표시하는 등 당시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다. 조선을 다른 나라보다 크게 그렸는데 조선 초기의 지도제작 수준과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지도는 원본이 아니다. 일본 류코쿠 대학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문화재가 20만 여점이나 된다고 하니 3.1운동 100주년을 기점으로 약탈된 문화재 반환운동이 전개되면 좋겠다. 역사는 언제가 강자의 기록이지만 정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고향의 품으로 돌아와야 힘이 생기고 또렷해진다.

권근은 이성계의 왕조 창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개국 후에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정의 요직을 맡았다. 그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다. 그의 나이 열일곱 되던 1368년(공민왕 17)에 성균관시, 다음해 문과전시에 급제하면서 영특함을 떨쳤다. 그러나 박상충, 정도전, 정몽준 등과 함께 명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주장하고 북원(北元) 사절의 영접을 막으려다가 이인임 등 친원파에 거슬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위기를 모면한 뒤에는 예문응교·좌사의대부·성균대사성·예의판서를 지냈으며, 1380년과 1385년 2번에 걸쳐 성균관시를 맡았다. 잘 나는가 싶더니 명의 황제가 보낸 서찰을 미리 뜯어보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390년에는 윤이(尹이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돼 청주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읽고 나라를 걱정했다. 그 때 저술한 책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이다. 성리학의 기본원리를 도식화해 설명한 책이다.

권근은 옥살이에서 풀려나 충주에서 살다가 이성계에 발탁되면서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조선의 주요 요직은 두루 맡았다. 특히 세종대왕의 스승인 변계량 등 수많은 인재를 발탁하는 일에 힘썼으며 왕명을 받아 하륜 등과 함께 <동국사략>을 편찬했다. <오경천견록>, <경서구결> 등 4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서 못지않게 오경, 특히 〈예기(禮記)〉를 중시하여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권근의 둘째 아들 권제는 조선 초의 문신이다. 1414년 친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예조판서,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했으며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고 정인지·안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짓기도 했다. 그는 부친 권근의 시를 모아 <양촌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권근의 손자이고 권제의 아들인 권람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학문에 뛰어났다. 1450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맡았는데 수양대군의 참모로 계유정난 때 세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1462년 좌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길창부원군이 되었다. 문집에 <소한당집>이 있고 <국조보감>, <역대병요>를 지었다.

권근, 권제, 권람 3대가 나라의 막중한 일을 맡았으니 가문의 영광이다. 양촌기념관 옆에는 세 채의 부조묘가 있다. 부조묘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한 곳, 이름하여 불천위(不遷位)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피는 못 속인다. 시대가 변해도 가족의 소중함과 가풍은 변하지 않는다. 길을 가다 멈추니 비로소 내가 보인다. 오늘은 내 마음의 낡은 풍경을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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