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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배꼽마당
풍향계/ 배꼽마당
  • 동양일보
  • 승인 2019.02.1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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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옛날에는 시골에 500집이 모여 있으면 당(黨)이 되고, 12,500집이면 향(鄕)이 되었다. 해서 ‘향당(鄕黨)’ 하면, 자기가 태어났거나 사는 시골마을을 말하는데, 이 향당 즉 시골마을에서는 ‘나이가 제일’ 이라 했다. 곧,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제일 어른이라는 말이다. 한데 이 마을은 물론이고 인근 몇 동네를 통틀어 나이가 제일 많을 뿐 아니라 명망 또한 높은 선비가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향선생이라 했다. ‘향선생’이란, 그 지방에서는 명망이 높은 선비를 이른다. 그런데 벼가 알을 밸 무렵에 한 동네사람이 이 향선생을 찾았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요.” “아니, 자네가 웬 일인가. 이 늙은이를 다 찾아오고?”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 조금 있으면 벼가 패고 또 좀 있으면 타작을 해야잖어유.” “그렇지 그러면 금방 또 벼를 말리고 또….” “그래서 왔습니다요.” “그래서?” “예, 베어놓은 볏단과 타작한 벼를 말리려면 널찍한 마당 같은 데가 있어야 하잖어유.?” “근데?” “그런데 그런 데가 없어유.” “지금까지 잘 해 왔잖은가?” “시방꺼정은 논뚝이며 밭뚝 여기저기에다 찢어발겨 볏단을 말리고 콧팽창이 만한 우리 집 마당에다 타작한 벼를 말렸지만 인제 아무래두 안 되겄어유.” “왜?” “올해부턴 배메기 논을 닷 마지기 더 부치잖어유.” “배메기 논을 닷 마지기나 더?” “예, 작년까진 주인하구 반타작하는 배메기 논을 엿 마지기 부쳤지만 풍년 들어야 삼배출(한 마지기에 3가마니) 쳐두 도합 열여덟 가만데 그것두 반타작 즉, 소작료로 소출의 절반을 내야 하니께 아홉 가마 아녀유. 그것 가지군 즈이 여덟식구 먹으랴, 가용 쓰랴, 애들 가르치랴 하자면 어림두 없어서 닷 마지기를 더 얻은 거지유.” “아니 그럼 열한 마지기니까 이천이백 평 아닌가. 또 배메기 밭두 있을 테고. 참 힘들겠네.” “없는 놈이 남의 땅 얻어 부치니께 힘든 거야 할 수 없지만 당장 볏단 말릴 데와 벼 말릴 데가 문제네유.”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이 있어야 자네 문제를 해결해줄 텐…” “선생님 땅을 달라는 게 아니구유 지주 어른께 말씀 좀 해달라는 거지유.” “지주한테 뭘 어떻게?” “지주 어른은 땅부자 아녀유. 논밭두 많지만 이 동네만 해두 선생님 네 하구 구장어른 네 하구 그 지주 어른 네만 빼구 삼십여 호 전부가 일 년에 쌀 두 말씩 텃도지 내는 그 지주어른 네 터 아녀유.” “그래서?” “그래서, 그 지주 어른께 동네 한 귀퉁이에 마당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고 선생님이 잘 말씀 좀 해 보시라는 거지유.” “내가?” “예, 선생님 말씀이라면 될 것두 같아서유.” “허허 거 참….”

그래서 향선생의 말을 들었는지 그 지주어른이 동네에 마당 자리를 내주었는데 그게 동네 가운데 있는 우물 옆의 미나리꽝이다. 평으로 치면 한 30평이나 될까 말까하니 마당으로선 작은 것이다. 하여 동네사람들은 그래도 그 지주어른 큰 선심 썼다 하고, 배꼽마냥 동네 중앙에 있는 작은 마당이라 해서 ‘배꼽마당’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면서 동네사람들은, 그 지주어른 비록 소작료를 배메기로 받기는 하나 눈치가 빠르고 경우가 밝아 향선생과 동네사람들의 속을 환히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고마워했다.

이후, 동네에서 이 배꼽마당의 주위를 말끔히 정리해서 어엿하게 꾸며서는 그 향선생을 찾아갔던 사람은 물론 다른 동네사람들이 농작물을 타작하고 말리고 하는 장으로 쓰면서 동네행사시 모임장소로 또 아이들 놀이터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향선생과 지주어른 그리고 당시 동네 또래 사람들이 다 세상을 뜨고 그 다음세대들이 동네를 꾸리게 된 어느 날, 그 지주어른의 맏아들 되는 이가 구장을 찾았다.

“선친이 살아생전에 나한테 누차 말씀하셨네. ‘언제고 내가 죽으면 지금 오십여 평된 배꼽마당에 바로 접해 있는 삼백여 평 밭을 동네에 희사하라’고.”

이를 구장이 동네사람들에게 전하고, 동네서는 이곳에 강당(講堂·동네서 젊은이들에게 강의, 강연을 하기 위해 마련한 큰 방)을 세웠다. 그리고 또 세대가 바뀌었을 때 이 자리에 경로당을 겸한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그래도 그 마당은 여전히 ‘배꼽마당’이다.

이장이 동네방송을 한다. “오늘 정월 대보름을 맞아 동네 배꼽마당에서 윷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모두 참여하시어 즐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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