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오강남 캐나라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대화를 펼치고 있다. 지난 12월 7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도마복음과 도덕경, 장자가 노년철학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복음서적이 여러 개 있었는데 기독교는 그 중에서 4개만 뽑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시켰습니다. 그 폐기된 복음서들은 대부분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마복음입니다. 4세기 이집트 나카마디라는 수도원은 폐기된 복음서적은 항아리에 모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려서 1945년 어떤 농부가 거름을 채취하다가 땅에서 발견했다고 해요.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것이 자유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받아야 잘산다는 것이 기본인데 도마복음은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자유를 준다는 내용입니다. 도마복음 내용 중에서 노인과 아이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오직 어록 114개만 있습니다. 도마복음 4절에는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남자아이의 경우 8일째에 할례를 하는데 여기에서 7일은 아직 성별이 갈라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 안된 상태 즉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죠. 나이든 사람도 초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아이처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순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런 것을 깨달으면 어린아이고, 깨닫지 못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이 불쌍한 존재ㅈ만 도마복음에서 길 잃은 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한 양이에요. 인습적인 세상에 머물 수 없는 특출난 존재로 자신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99마리의 양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인데 도마복음은 보통사람처럼 삶을 살지 말고 특출한 사람이 되어라.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아이한테 배우라는 것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사상의 음양도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입니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깨치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마지막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참모습을 믿지 않고, AD4세기에 로마가 세계 종교학에 많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노년 사회에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자식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고,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사람을 천사라고 칭송했고, 마지막 남은 집도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님을 모시려니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교회에 가서 기부한 것을 조금 돌려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교회는 거부를 했다고 해요. 왜 그분이 그런 결정을 했느냐 생각해보면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노인을 위해서, 너무 천국에 집착을 하고 있으니 도마복음을 통해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를 통해 인간의 상식수준이 회복되어야 온전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 교수 “도마복음에는 천당이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우쳐서 자유로움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절에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처음엔 당황, 혼란, 더 궁구해보면 ‘아 그럴수도 있나’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고 마지막으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신학자 중에는 마르크스 볼브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지금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 즉 인습적인 기독교,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로 나누고 인습적인 기독교는 천당, 지옥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특징 지었습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변화의 기독교 즉 의식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식의 변화를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본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새롭게 눈을 뜨자는 것을 추구합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 말씀드리면 노인상은 전통적인 것과 변혁적 노인상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점은 믿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와 깨달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 일본에 쿠우카이(空海)라고 하는 불교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신자가 이것 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요약을 했으니 그것을 믿고 날마다 암송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이초(最澄)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을 노인상과 연결짓는다면 전통적인 노인상이라는 것은 ‘노인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al 노인상인데 지금 정해져 있는 노인상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과거지향적이고, 고정되고, 비관적이고, 모든 면에서 비건설적인 노인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노인은 지혜가 있고, 경험이 풍부하고, 어느 세대보다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남성 청장년 중심사회라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아이, 노인은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사회였다고 느꼈습니다.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청장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을 다 끝내면 가치가 없느냐, 아니에요. 생물학적인 생산성은 없지만 문화적인 생산성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손자를 통해 개체생명과 우주생명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그 손을 잡을 때마다 제 개체생명을 넘어서는 역동하는 생명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에서 오늘 인용해주시는 말을 보고 진정한 혼과 혼이 통하는 관계가 맺어지면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우주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미래를 여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오 교수 “서양에서는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라는 말도 나왔는데 에이지즘이 너무 보편적입니다. 사실 동양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좋았어요. 우리 속담에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의 단순성, 진실성과도 관계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속설로는 아이가 누구에게 의지하듯 노인도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인데 깊이 들어간다면 기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아이처럼 초이분법적 상태로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일본에 옹동론(翁童論)이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노인과 아이고 중장년은 불안정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아동과 노인의 힘이 상생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깨달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생명과 연결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때 어린아이와의 마주침 속에서 노인이 그것을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405060세대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시기에요. 하는 일에 힘을 전부 쏟기 때문에 현세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이 다 끝나서 708090세대가 되면 우선 직장에서 나오고,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이 드물게 되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합니다. 노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노인상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사회에서도 숨어서 기여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일본 사회가 굉장히 청결한데 사람들이 다니기 이전에 노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게 청소를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데 계속 이렇게 한다면 혐노 의식만 커지고 세대 간 관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인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노년층을 ‘노인충’이라고 부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해주신 말씀들이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1절에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노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뜻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오 교수 “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인 것, 심적인 것, 영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해석이 있는데 보통 1~2층에서 끝납니다. 3~4층까지 가면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희랍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두가지가 있어요. 비오스와 조에인데 비오스는 생물학적인 생명력, 조에는 의미있는 삶, 깨어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몸은 죽은 것이에요. 몸은 죽지만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의미 있는 삶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의 생각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비오스는 도시국가 안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생명력이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조에와 똑같이 개체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과 연결되는 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호흡이라고도 하는데 우주의 기를 들여 마시고 자기 속에 있었던 오염된 공기를 뿜어내면서 순환을 하는 과정에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비오스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학적 생명인데 개체생명을 구성하는 요인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우주생명은 영성, 영혼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하는 것은 생물학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생명은 죽지만 우주생명과 연결이 됐을 때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 교수 “도덕경의 기본 가르침은 도. 도를 우주의 기본 원리, 실제로 여기고 그것에 따라 살면 덕을 본다고 합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에요. 도를 말로 제약하면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습니다. 56장에 보면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신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안다고 떠드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도마복음 어디나 똑같습니다. 도덕경은 ‘무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이기적인 행동을 다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무위는 노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이 되면 무위자연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 일방적인 사고, 고정관념, 선입견을 하루하루 없애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노년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저도 노년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동양의 전해 내려온 문헌을 하나 찾아서 거기서 여러 가지 발상의 근거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도덕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무’를 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하다’라는 동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장년에는 유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큰데 노년이 되어서는 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무나 공을 이해하는 단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년기에서 중장년기에 열심히 배운 뒤 노년기에 가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벗어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기를 이렇게 받아들어야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장년기처럼 앎을 추구하면 안되고 거기서 벗어나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해야 합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자연스러워야하고 젊음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연령차별이 굉장히 심각한 사회입니다. 생각을 바꿔서 우선 연령차별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 오늘 요약을 해주신 것이 노년기 철학적 마음가짐에 기본이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공감을 합니다.”



▷오 교수 “장자에 붕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해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나중에 새가 되면 붕(鵬)이라고 합니다. 크기도 무척 커서 날개를 피면 하늘 구름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해(南海)로 날아간다고 해요. 9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붕새를 비웃습니다. 자기들은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나무 위에 올라가는데 뭐하러 9만리나 날아서 남쪽으로 가냐는 겁니다. 저는 붕처럼 되지는 못해도 붕을 비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도 장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제약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는 더 깊은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변화되고, 그만큼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한쪽 면만 보는 사람은 융통성을 가질 수 없어요. 양쪽을 다 봐야 합니다.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장자에서 말하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장자 2편에는 남곽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오늘은 예전 모습과 달라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남곽자는 자신이 오상아(吾喪我)를 했다고 대답했어요. 오상아는 내가 나를 여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특수 인식을 활성화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특수인식을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정이 나옵니다. 포정이 소를 춤추듯이 잡으니까 왕이 기술이 좋다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포정은 이것은 기술이 아니고 도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가 기술 경지를 넘어서면 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 오상아를 해서 인식이 변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유교에서도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의 변화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좌망(坐忘)이 있습니다. 안회는 공자에게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다고 보고했어요. 공자가 자기는 인이니 의니, 예니, 악을 다 잊었다고 했고 결국에는 좌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서 큰 트임(大通)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심재(心齋)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굶긴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안회가 등장하는데 위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안회가 가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안된다고 했어요. 마음을 굶어야 한다고 했지요. 지금 마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장자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입니다. 장자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 북을 치면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자기도 감정적으로는 슬펐지만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공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면이라는 것을 알고 슬픔을 극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죽음을 슬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노인상과 연관 지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자, 장자를 그대로 따라할 수 없지만 이정표로 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년이 됐을 때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요.”



▷김 교수 “장자가 노년철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러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절대화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특정 교리에 얽매여서 굴복되고 왜곡되어선 안된다는 모습을 자세하게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세가지 키워드 오상아, 좌망, 심재. 인상 깊었고 오늘 노인철학에 주는 메시지는 깨달음의 밝은 빛을 통해 노인의 어두움을 벗어버리면 노년이 황혼기라는 착오에서 벗어나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 주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이후를 생활하는 것이 오상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무장화된 자기 자신을 말하는데 70세 정도 넘으면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은 장사를 지낸다는 것인데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는 과정이 바로 노년기의 인생입니다. 오상아를 하지 못하는 노인은 젊은 세대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는 다섯 개의 구멍을 말하는데 첫째가 귀. 귀로 들을 소리를 듣고,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는 듣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눈인데 안봐도 되는 것은 보지 말고 봐야 될 것만 보라는 의미. 세 번째는 입이고 네 번째는 코입니다. 우주 생명을 순환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항문입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대장, 소장, 직장, 항문을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은 오래살려면 장이 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목구비까지는 신경을 쓰는데 항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먹어서 속에 넣는 것만 생각하지 내놓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순환을 코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문도 똑같은 비중으로 순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가지의 구멍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을 ‘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지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로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고 온전한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오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노년기의 삶은 바로 오상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상아는 과정일 뿐입니다. 오상아를 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타자와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A, 죽어서 가는 세상을 B라고 할 때 A에서 죽으면 B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 살게되고, 또 거기서 죽으면 다시 A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탈바꿈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좋은 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오 교수님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어떻게 노년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소스를 발견,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박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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