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중원대 교수

 
이상주/ 중원대 교수
이상주/ 중원대 교수

 

(동양일보) 1752년 지금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4리 선유구곡에 전대미문의 일대 문화산수개벽공사(文化山水開闢工事)를 단행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녕(李寧 1514~1570이후)은『주역』팔괘를 자연에 적용하여 선유동팔경(仙遊洞八景)이라는 문화산수(文化山水)를 창의했다. 그 후 후학들은『주역』구오(九五)의 원리와 도통(道統) 즉 학통(學統)계승의식을 발휘하여 선유구곡(仙遊九曲)을 정했다. 주자 율곡 우암의 도통을 숭상하는 도통계승의식을 구곡으로 발현한 것이다. 장소는 같은데 명칭이 달라졌다. 응용창의력이며 여세추이(與世推移)의 선변(善變)이다. 이들은 와룡폭포(臥龍瀑布)에서 용과 함께 수영을 하며 문화산수인 구곡에 대한 산수평론을 하고 자연을 철학과 문학으로 승화했다. 이들은 용의 전지전능함을 알아보는 고식(高識)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녕의 선유팔경은 다음과 같다. 제1경 송정대월(松亭待月), 송정은 지금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송정마을 송면교회가 있는 곳이다. 제2경 문암수계(門巖修契), 문암은 지금 괴산군 청천면 명암리 청천자연학습원 근처 울바위로 추정한다. 제3경 화양상춘(華陽賞春), 화양은 지금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금사담주변이다. 제4경 파곶심승(葩串尋僧), 파곶은 지금 화양구곡 제9곡 파곶이다. 제5경 사평목우(沙坪牧牛), 사평은 지금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다. 우복동(牛腹洞)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다. 제6경 선동방학(仙洞訪鶴),선동은 지금 괴산군 청천면 삼송4리 선유동이다. 제7경 화산채약(花山採藥), 화산은 지금 경북 상주시 화북면 화산리다. 제8경 기탄조어(歧灘釣魚), 기탄은 지금 괴산군 청천면 지촌리(芝村里)로 추정한다. 2001년 5월 22일 괴산군 청천면 삼송4리 선유동에 거주하는 박온섭(1938~ ) 전 충북도의원께 전화로 여쭤보았다.

이녕이 선유팔경을 정하고 약 200 여년이 지난 후, 우암의 제자 민진원은 권상하가 정했던 화양구곡을 1721~1727년 사이에 다시 정하고 그 곡(曲)의 명칭을 바위에 전서(篆書)로 새겨놓았다. 화양구곡 제4곡 금사담은 위에서 보았듯이 선유팔경 제3경 화양상춘(華陽賞春), 화양구곡 제9곡 파곶(葩串)은 선유팔경 제4경 파곶심승(葩串尋僧)에서 착안했다. 파곶(葩串)은 지금 화양구곡중 제9곡 파곶이다. 화양구곡 제7곡이 와룡암(臥龍巖)이다. 용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놓았다. 이렇게 선유팔경 제6경 선동방학을 제외한 선유팔경 권역에 화양구곡을 설정했다. 이후 약 30년도 안 돼서 선동방학 자리에 선유구곡을 정하는 민첩성을 발휘했다. 화양구곡을 온고지신한 것이다. 견문의 실력이 응용창의력의 실력이다.

선유구곡 입구에 ‘선유동문 이보상서(仙遊洞門 李普祥書)’, 선유구곡 제9곡 은선암(隱仙巖)에 ‘김시찬(金時粲)․이보상(李普祥)․정술조(鄭述祚)․동주 이상간(洞主 李尙侃) 임신 구월 일(壬申 九月 日)’이라 새겼다. 임신년은 1752년이다. 연하구곡의 설정자 노성도(盧性度)는 연하동문(烟霞洞門) 옆에 노경은(盧敬隱)이라 자신의 성과 호를 새겼다. 갈은구곡의 설정자 전덕호(全德浩)도 갈은동문(葛隱洞門)이라 새기고 갈천정과 고송유수재 2곳에 전덕호라 새겨놓았다. 이로 보아 위의 세 사람이 선유구곡을 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을 정한 사람들은 이녕이 선유팔경을 정한 사실을 몰랐거나, 신응시와 구사맹 이황 성운 등의 문집이 간행 된지 몰랐을 수 있다. 송인(宋寅 1516~1584)의「증칠송거사병서(贈七松居士幷序)」에 “선유동의 승경에 대해 후인들이 혹 어둑하게 될까봐 염려하여, 돌아다녀야 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그것을 표시하여 알릴 방도를 생각한 것은 기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라 했다. 필자가 이를 근거로 하여 선유동 화양동 일대에 글씨를 새겨놓을 만한 바위표면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선유팔경의 설정향유자인 이녕(李寧)에 대해 필자가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의 문집 속에서 그 진실을 찾아내서 그의 진면목을 고증했다. 시각적으로 분명한 기록이, 실존했던 진실을 본의든 고의든 퇴색 말살시킬 수 있으며, 아울러 퇴색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도 있다는 준엄한 사실을 깨달았다. 퇴계(退溪)는 선유동에 오지 않았으며 선유팔경을 설정하지도 않았다. 예안으로 자신을 만나러온 선유팔경의 주인 선유거사 이녕에게 극진한 예우를 하기 위해「선유동팔영시」를 지어준 것이다. 기록은 영원하다. 기록은 진실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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