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948년 2월 7일 남한의 미군정지역에서 남조선로동당 기획으로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투쟁목표가 내걸리면서 전국적으로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파업에 관한 허용과 규제가 법으로 정해진 바가 없었으니, 불법 파업이라고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당시 미군정은 1946년 5월 16일 공산당원이 관련된 정판사 위조지페 사건 이후,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미군정하의 법질서상 “2·7 폭동”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하겠다. 그러나 좌파에서는 아직도 “2·7 구국투쟁”이라고 옹호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당시 남조선로동당이 1948년 5월 예정된 남한만의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총선에 반대하는 여론의 일단을 이용하여, “단선단정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엔 한국 위원단 반대,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이승만 등 친일파 타도, 노동법과 사회보험제 즉각 실시, 노동임금을 두 배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토지 몰수하여 농민에게…. ”등을 외치며 전국적으로 동시에 파업을 강행한 사건이다.

서울에서는 철도 노동자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남대문과 영등포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수십 차례 거리로 나선다. 부산에서는 부두 노동자와 선원들의 파업으로 해상교통이 마비되고 전차도 정지된 가운데, 학생 45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밀양에서는 지서를 습격하는 농민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10여 명이 사살되었다. 합천에서도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였다.

2월 9일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 라는 글에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파업사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온다. 2월 20일까지 200만 명이 파업게 동참하여 100여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8,500 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이는 우발적인 성격을 가진 대구의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기획된 것이지만 사상자와 체포구금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참여 단체들을 반국가단체로 파악함으로써 이들은 각 지역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조선인민유격대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결국 ‘2·7사건’의 불행은 또다시 제주의 ‘4·3 사건’의 물온한 씨앗이 되고 만 것이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5·10 총선을 저지하여 남한만의 ‘단선단정’을 막아내고,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4월 3일 새벽 2시, 제주 남로당 김달삼이 350여 명의 무장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12개의 경찰지서를 급습하면서 발발하였다.

김달삼의 고향은 제주였다. 도쿄의 중앙대학에 다니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된다. 해방 후, 1946년 10·1 대구 사건에 참여하였고, 그해 12월 제주도 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레닌의 맑스주의를 가르친다. 1948년 4·3 때는 남로당 제주도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친일파 척결, 외지경찰철수, 남북 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고 나선다. 급기야 중앙당의 지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4·3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는 1948년 8월 돌연히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의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한다. 이때 남한에서 1,002명의 대의원이 참가하는데, 제주 대표로 참가한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으로 선정되었고 국기훈장2급을 수여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강동정치학원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는다. 1949년 8월 훈련은 마친 그는 유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일월산 일대로 침투하여 유격전을 지휘하다가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으며 북한 당국은 묘비에 ‘남조선혁명가’라고 적어 넣어 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CNN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후, 제주 4·3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2000년 1월 드디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4·3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2014년부터 '4.3희생자 추념일'이 지정되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이 사건으로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으로 밝혀졌다. 너무나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사적 불행은 여기서 문을 닫지 못한다. 제주의 4·3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명령이 14연대에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의 불행한 그림자가 또다시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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