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피해 공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가 먹고 “절미”

공산성 진남루 서측에 있는 쌍수정에서 공주시 손권배(위 사진) 부시장이 인조와 인절미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인조가 공산성에 10일간 머물렀던 사실 등을 기록한 사적비(아래 왼쪽)와 이를 설명해 주고 있는 조중범 기획담당관(가운데) 및 쌍수정이 있는 왕궁지(오른쪽) 전경.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씩 이런 부질없는 희망을 가져본다.

‘인절미의 본고장’ 공주에서 생각하는 조선 임금 인조대왕이 그렇다. ‘그가 성군이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애증...

2월 28일 오늘. 1624년(인조 2) 음력 정월 24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이날,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공신 이괄이 군사를 일으킨다. ‘이괄의 난’.

이괄과 인조, 그리고 공주와 인절미는 어떤 관계일까.

평안도 영변에서 출발한 이괄의 쿠데타군이 경기도 벽제에까지 다다르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로 파천해 장기전에 대비한다.

공산성에서 풍찬노숙 피난생활을 하던 인조에게 어느날 특산물이 올라왔다. 떡이었다. 허기를 채우던 인조가 기막힌 맛에 놀라 이름을 묻자 신하는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진상한 것'이라 보고했다.

인조는 “진정 절미(絶味. 최고로 맛있음)로구나”라며 극찬했다.

쿠데타는 거병 21일만인 3월20일 안현(鞍峴, 길마재)에서 이괄의 목이 달아나며 평정됐다. 인조는 3월24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임씨 성의 백성이 만든 떡’ 임절미는 세월이 흐르며 ‘인절미’가 됐고 공주는 본고장이 됐다.

이같은 기록과 흔적은 현재의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1708년 제작)에 남았다.

공주시는 2010년 백제문화제 행사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떡으로 기네스북에 도전한 바 있고, 매년 인절미 축제를 개최하면서 인절미가 공주지역 특산품임을 홍보하고 있다.

이어 2016년 9월 26일 특허청으로부터 ‘지리적표시 단체표장’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에 대한 공주시민들의 애증은 ‘만족스럽지 못한’ 역사평가에서 출발한다.

인조에게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파천 3관왕'이라는 불명예 타이틀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난리를 피해 궁을 버리고 3번이나 한양을 떠난 임금으로는 인조가 유일하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때 일이다.

심지어 삼전도의 굴욕은 역사가들이 후대에게 가장 가르치기 싫어하는 '팩트'다.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마저 죽이는 등 비정하기까지 했다.

공주에서 '인조 덕분에 우리가 인절미의 본향이 됐어'라며 대놓고 자랑하기 주저하는 이유다.

하지만...

공주시민들은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픈법’이라는 사실을 안다.

‘인조의 역사’를 되새기기보다 인절미 본향의 자랑과 맛에 대한 자부심을 먼저 앞세운다.

공주 인절미는 장시간의 반죽작업 덕분에 탄력성이 우수하고 씹는 맛이 쫄깃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절미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축제때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인절미 재료인 찹쌀과 콩 등 지역 농산물 판매가 늘어나는 것도 부수적 효과다. 공주 산성시장 주변에 떡집만 20여곳이 밀집해 성업중이다.

공주의 효자 떡 인절미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공주 유환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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