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미가요마루'에 타고 오사카치쿠코우에 상륙하는 제주도 출신 조선인 (조선총독부편 '조선의 인구 현상' 1927년에서)
조선인 학교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있는 가운데 독립 후에도 지배국이었던 일본에 남아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지키며 살아온 재일동포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선조들의 목숨을 내놓은 항거 끝에 우리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지만 그 선봉장에서 활동한 후손들은 조국을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강제 징용·징병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으로 넘어가야 했던 그들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1945년 독립 이후에도 재일동포 1~3세는 식민지 국민이라는 이유로 갖은 멸시와 핍박을 받는 등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다.

고(故) 오자와 유사쿠(小澤有作·1932~2002) 전 도쿄도립대 교수는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라는 책에서 재일동포들의 험난한 삶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반 친구인 구 군이 조선어로 말하고 있는 것을 담임(일본인 교사)에게 일러바쳤다. 담임은 그를 꾸중했다. 그러자 구 군은 정색을 하며 큰소리로 ‘조선 사람이 조선 말로 하지, 무슨 말로 한단 말입니까’하며 정면으로 대들었다. 곰(담임의 별명)은 화가나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구 군의 얼굴을 사각진 시간표 판으로 후려쳐서 피가 흘러내렸다.(어느 재일조선인의 회고)”

1920~1945년 8월 광복까지 일본정부는 민족학교의 설립을 금지·억압하고 일본학교 취학을 의무화 했다. 민족학교 설립이 알려지면 즉시 경찰에 의해 폐쇄당했고, 일본학교에 간 조선동포들은 일본화 교육 즉, 동화 교육을 받으며 천황숭배 의식을 주입받았다.

광복을 맞은 재일동포들은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즉시 민족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을 실시했지만 일본은 1948~1949년 민족학교를 강제로 폐쇄하고 일본학교로 전학시켰다. 학교를 세우고,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고, 가르치는 것 모두 그 부모들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에 순종적인 조선인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민족학교 확산에 위기감을 느꼈고, 다시 동화교육을 펼쳤다.

일본은 조선학교를 치안문제로 여겨 때로는 강압적인 수사를 하기도 했다.

“도내의 6개 조선인소학교에 대해서 수천 명의 무장경관과 장갑차, 기관총까지 동원해 교내를 구석구석 수색했다. 이과의 실험재료는 화염병 재료라고 하고, 운동회에서 쓰는 막대기는 죽창이라 하여 압수했다. 교원 10명은 소요 용의자로 잡아갔다. 이 때문에 후카와가의 도립 제 2조선인소학교에서는 6명의 교원 전원이 잡혀가 수업 정지 상태에 빠졌다.”(1952년 세계교원회의에 제출된 보고서 중)

이러한 일본의 핍박 속 1970년까지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민족교육 말살에 맞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1970년 이후 지자체에서도 민족학교를 학교로 인가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그들은 조선인이란 이유로 숱한 차별을 받으며 때로는 극우단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충호(66· 전 옥천상고 교장) 문학박사는 “일본에서 만난 재일동포 1세대들은 독립 이후에도 도망다니고, 숨어다니는 것에 익숙했다”며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후손들은 1세대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재일동포들은 광복 후에도 가혹한 식민지 민족의 삶을 살아야 했다”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재일동포의 힘겨운 투쟁사를 이제라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에는 전전(戰前) 일본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 교육·동화·협화로부터, 전후 외국인 학교 폐쇄와 민족교육 금지 등 비인도적인 처우가 시기별로 나누어 실려있다.

일본에 남은 재일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고난의 내용은 3월 4일부터 월 2회(월) 동양일보에 시리즈로 연재된다. 박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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