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대화를 펼치고 있다. 지난 12월 20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정진홍 서울대 명에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노년의 자각, 노년에 대한 인식 변화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날 대화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제가 일본에서 한 30년 동안 공공철학 운동을 하다 80세가 돼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 3가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요. 한가지가 연령차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국에서는 연령차별 문제가 꽤 심각한 상황이 됐습니다. 최근 노년을 벌레에 빗대는 ‘노년충(老年蟲)’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 됐습니다. 사회복지나 의료적 차원에서 노인에 대한 것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지만 노인의 자각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중장년에 의한 철학만 있고 청소년이나 노년 철학은 없는 상황이에요. 노년이라는 것을 의식이나 자각 차원에서 정리하는 경우가 없어요. 2025년 정도면 우리나라도 초고령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상보다도 빨리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인데 막상 노년에 계신 분들이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젊어 보인다’는 말이 칭찬으로 통하는가 하면 늙었다는 것을 싫어하고 부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정진홍 선생님께 특히 여쭤보고 싶은 것은. 젊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노년기가 되니 이런 점을 느끼게 됐다 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노년의 삶이나 노년에 대한 이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 더 다듬어서 이해도 잘 할 수 있고, 노년의 삶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노년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그것을 가르칠 적에 효과가 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노년에 대한 것은 주로 수필식 체험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거꾸로 생각을 해보면 노년에 대한 것이 수필이나 감상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에게 질문 주신 것과 연결시켜 말씀을 드리면 저는 한강 근처에서 산지 25년 정도가 됐습니다. 젊었을 때는 한강대교에서 잠수교까지를 뛰어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달리기가 안되더군요. 그래서 속보를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속보도 어려워서 그 다음부터는 그냥 걷고 있습니다. 뛸 적에는 목표 지점만을 향해서 갔습니다. 속보를 할 때도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걷다 보니까 뛰거나 속보를 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바람 소리도 듣습니다. 나이드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같아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늙으면 보이고, 안 들리던 것도 들리게 돼요. 젊을 때는 개념에 메여 있었어요. 글을 봐도 개념적 명료성, 논리적 일관성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경험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에요. 삶의 일상 속에서 다시 한번 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노인들을 위해서 철학적인 체계를 일관화 하는 것 보다 수필, 감상을 통해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시도는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노년을 수필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을 동기화 해주는 것이 결국 노년 철학이 아닐까 합니다. 노년 자체가 무엇인지 철학적 개념으로 하나의 인식으로, 지적 내용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요. 보통 에이징(Aging)을 규정하는 것을 보면 ‘몸이 회복 불가능한 퇴행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저는 노년에 대한 문제 인식의 출발점이 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로병사는 철저하게 육체(physical body)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누구나 겪는 현상입니다. 노년이라고 하는 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연결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노년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치매입니다. 치매는 기억의 상실인데 이것은 자아의 상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종교적인 법열(法悅), 성령의 강림을 경험했어도 치매를 앓게 된다면 아무 의미도 없게 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보람이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 치매가 몸의 현상입니다. 몸의 현실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참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30대에 느꼈던 것을 40대, 50대, 60대에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은 50대인데 30대, 40대에 보고 들은 것으로 살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때 한 물리 선생님이 너희가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더 커서 보면 세상은 지금 보는 것보다 더 넓고, 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삶의 경험에 따라 공간이 확장돼야 하고, 공간이 확장되면서 그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 머물러 버리면 늙은 줄도 모르고 평생 젊다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 거에요. 젊었을 때부터 늙은이까지 일관되게 생로병사라는 것이 있다고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이 들고, 병이 들고, 죽는 것이 삶의 현실이라고요. 생명과 더불어 있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 해서 생로병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면서 죽음도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노년이 장년의 연장과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자연입니다. 그 일관된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죽음을 시사했으면 좋겠어요.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조망하는 그러한 것이 노년에서 강조되고 서로 논의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글을 많이 쓰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텍스트에 빠져서 인식에 집중하고 있는데 조금 더 감성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감성이나 의지는 연속되는 마음의 결이지 단절되는 요소가 아닙니다. 노년이 스스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의 성취에서도 자유롭고, 자기 실패, 의무에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노인이 되면 몸의 주기에 대한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다가왔습니다. 또 마음의 결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결국 그 목표는 자유의 지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두 구조가 갈등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몸을 객관화 한다는 것은 몸 자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인데, 또 순결한 마음의 결을 가지려면 몸을 관조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한·일세미나를 통해 노년은 황금기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에이징은 성숙으로 가는 길이며, 생각의 차원에서는 넓고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차원을 잘 다듬기만 해도 황금기라는 자각에서 긍정과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 중에 백발노인과 동자가 함께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신선과 동자가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너무나 평화로웠고 무릉도원이었습니다. 마음의 결을 통해 어떻게 몸이 갖는 죽음의 숙명성과 병듦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이 그림과 연결지어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그림 설명에 도가 통하면 동자는 항상 부르면 오고, 새소리는 항상 들린다고 쓰여있습니다. 이 부분이 아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늙어서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됐고 보지 못하던 것도 볼 수 있게 됐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몸의 문제이지만 마음 결의 문제이고, 마음 결은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지점을 되돌릴 수 있는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잘 다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여태까지 서양철학은 몸과 마음을 나눠서 봤기 때문에 갈등도 일어나곤 했습니다. 젊을 때는 감성과 이성이 중심이 되는 삶이라면 나이가 들면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고민하게 되는데 이것은 감성이나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영성을 통해야 합니다. 노년은 자기가 영성에 눈뜬 그런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영성이라는 차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뇌과학을 공공철학에서 다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뇌과학의 최대 문제는 신체 과학적 작용에서 어떻게 정신적 작용이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체 과학적 작용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spiritual) 것이 생산된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몸의 차원을 아무리 밝혀도, 정신·영성적인 측면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80이 되어서야 그동안 소중한 것들은 안보고, 무시하고, 버리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늙음은 학(學)의 단계에서 유(遊)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즐거워하고 이자(仁者)는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탐자(探者)는 ‘통’입니다. 개체 생명만 생각하던 사람이 우주 생명에 눈을 뜨고 통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부분에서 제가 그동안 생각한 것들과 접촉되는 부분이 있어서 공감했습니다.”



▷정 교수 “노인들을 위한다는 사회보장제도는 노년을 대접하려고 만든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노년을 배제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사회에는 묘한 배제의 논리가 꽤 심각한 것 같습니다. 배제의 다른 면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에토스를 어떻게 따뜻하게 바꿀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나이 50이 되면서 늙는다는 것이 실감이 들더군요.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거에요. 그때 당시에 늙으면 이렇게 되고 싶다 하는 바람을 담은 글을 썼는데 어느 틈에 일흔이 되었더라구요. 저는 일흔이 되면 신선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전하더라구요. 가지고 있던 고집이 신념으로 바뀐다던가 하는 변화는 없었어요. 그때 든 생각이 여든 살이 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어요. 50살이 됐을 때, 60살이 됐을 때 어떤 노인이 될 수 있을까 조목조목 글을 썼는데 80이 되니까 이제 더 이상 쓸 수 없더라구요. 늙을수록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도 몸과 마음이 역설적이라고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나도 모르게 지니고 있는 이원론적인 생각, 인과론적인 생각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에 잡혀 있으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이 안되니까 역설이라고 하는 것인데 개념적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해석을 해야 할 때입니다. 갈등이나 역설을 넘어서려면 인식의 언어로는 안되고 고백의 언어로만 가능합니다. 설명은 인식의 언어이고, 해석은 고백의 언어에요. 늙으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그것은 가르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김 교수 “지금까지 사회보장제도는 노인을 위한 제도로, 차별 수정 조치라고 해서 긍정적으로 인식해왔는데 그 맥락에서 보면 배제의 논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통찰인 것 같습니다. 중장년의 중심세력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잘 운영하지 못하면 포용보다는 배제의 아픔을 수반할 수 있다는 것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처음 이야기하신 ‘마음의 결’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성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의 논리로 이 이야기를 풀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강조한 것은 공적영지(空寂靈智)입니다. 이것은 텅빈 충만을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알고 보면 돈오의 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이고, 돈오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면 부처라는 것입니다. 노인도 사실 돈오 차원이 있습니다. 또 선하고 교를 연결하는 ‘원돈신해문’이라고 있습니다. 고백의 언어인 ‘교’, 즉 부처님의 말씀과 직접 체험한 ‘선’을 연결하는 것을 원돈신해문에서 다루고 있는데 오늘 말씀하신 설명의 언어가 아닌 고백의 언어로서 자기체험을 각자 텅빈 충만의 세계와 연결하는 작업을 하면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눌은 생활 속에서 텅빈 충만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 간화경절을 강조했습니다. 간화는 자신의 의문을 지켜보면서 절실하게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다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가장 중요한 의문을 늘 유지하고,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문이라고 하는 것이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가서는 생활 속으로 자꾸 연결해서 점층적으로 연결해가는 부분을 오늘의 노인철학에 대입해보면 정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의 날개를 유용한 상태로, 배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삼아 자기 체험을 고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차원의 자양분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느꼈습니다.”



▷정 교수 “제 책 중에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이 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어요. 인간의 의식 속에는 상상력이라고 이름 붙인 기능이 있습니다. 상상력의 산물들과 만나면 공부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이 깨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노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오히려 노인들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베르베르 소설을 보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 소설에 굉장히 시설을 잘 갖춘 버스가 있는데 어떤 집 노인들이 외출을 며칠 안 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그 차가 와서 데려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차에는 ‘노인들의 천국, 노후의 삶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어요. 그것을 타고 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차가 오면 이웃에 살던 노인들이 불안하기 시작하고 그 차가 나타나면 노인들이 도망가는데 우리 사회를 아주 희화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인들을 위한 제도적 정책이 결국은 노인들을 잘 데려다 죽이는 것이거든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게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공부를 하면서 일상을 직면하지 못할 때는 상상력을 빌려서 우리의 실상을 조금 더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노인복지에 대한 것, 병원에 대한 것들 이 모순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아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셨는데 노인 옆에 소년이 있는 그림은 ‘에이징’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금은 옛날 전통적인 가족은 다 사라졌어요. 패밀리는 없고 홈만 남았다고 하더군요. 그 홈도 다양해요. 세대 차이가 어울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만나야 합니다. 그림에 노인과 동자가 함께 있듯이요. 서울대 총장 된 오세정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양반이 서울대 자연대학장을 할 때 저한테 와서 원로가 젊은 교수들에게 이야기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젊은 교수가 ‘저한테 대한민국에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물었어요. 준비하지 않은 질문이어서 그만 당황했는데 ‘난 여러분들을 신뢰합니다’라고 말하고 끝났어요. 그 순간 현장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젊은 교수들은 그 답을 듣는 순간 어떤 대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을 경험하고 느낀 것이 우리가 그동안 젊은이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젊은 세대는 어른들한테 신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가 붕괴된 것이에요. 누가 잘잘못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같이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그것이 늙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미래를 사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요. 내가 예전에 어떻게 해보니 어땠더라 하며 그저 내 삶을 증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김태창: “오늘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노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노인관을 자각하고,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가 오늘 과제입니다. 오늘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학적 패러다임이 우리의 사상과 철학, 특히 한국의 철학적 마음가짐에 지나치게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한 철학대화를 총정리하다가 문득 장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너희들을 땅의 소리를 들었느냐. 땅의 소리는 들었겠지만 사람의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다, 사람의 소리는 들었겠지만 하늘의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다.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으라고 했는데 저는 여기서 기가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으로 들으면 들리는 것만 듣게 되고, 마음으로 들으면 마음에 드는 것만 듣게 되기 때문에 온전히 기로 들어야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는 뜻 같아요.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에요. 비울 때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지가 따르지 않으면 감성도, 이성도 살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일본 외과대학에 긴급 구명센터가 있는데 거기 병원장이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 있어도 환자가 살려는 의지가 없으면 낫질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용환 교수의 이야기와도 통하는데 내인적 병증, 외인적 병증이 있는데 외인적인 것은 수술이나 약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의지가 없으면 안됩니다. 또 의지만 있어도 안됩니다. 내인성과 외인성이 만나야지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됩니다. 줄탁동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노인은 사회경제적으로 규정된 것이에요. 생식적인, 경제적인 생산력이 없거나, 힘이 약한 존재입니다. 사회 통념에 맞지 않게 되니까, 받들어 모시는 식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늙음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의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경제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노년의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산업·공업사회다 보니까 생산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개개인도, 노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인들의 자기인식도 변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함께 살리는 근원적인 생명력, 즉 영성을 찾아야 합니다. 생명의 결 가운데 몸도 있고, 마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늙어가면 생은 쇠퇴하고, 명이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생과 명은 상호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쇠는 한편으로 노숙의 과정입니다. 노화될수록 유익한 점이 있는데 이것을 균형을 잘 잡아서 나이든 분들의 자기인식, 사회경제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정 교수 “만약에 우리가 어렸을 때 삶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오늘날 노인들의 문화가 염려할 정도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절되지 않는 긴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죽음 준비 교육이 유행입니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컬처 패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되고 아까 말씀드렸지만 삶에 대한 교육은 쭉 이어져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이 꼭 노인들만을 위한 교육이라고 규정되면 안되고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합니다. 연습을 통해서 그런 문제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삶을 직면하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것을 터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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