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동양일보) 이제 추위가 물러가고 봄기운이 완연하다. 기온이 오르면서 많은 생명들이 기지개를 켠다. 조만간 나뭇가지에는 꽃망울이 맺히고 대지를 뚫고 새싹이 올라올 것이다. 개구리도 뱀도 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봄의 위대한 생명력은 이렇게 변함이 찾아오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마음 놓고 봄을 즐길 수 없다. 바로 미세먼지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되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미세먼지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올 봄이 최악의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미세먼지 농도를 가장 먼저 체크한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마스크 쓴 사람을 보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학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사라졌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에는 식당 장사도 잘 안된다고 한다. 모두 미세먼지가 몰고 온 일상의 변화이다.

미세먼지로 덮인 희뿌연 하늘을 보면 우리의 마음도 잿빛 하늘만큼이나 착잡하다. 국민의 미세먼지에 대한 우려는 분노로 바뀐 지 오래다. “이것이 나라냐”부터 “이민만이 해결방안이다”는 반응까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 외에 하는 게 무엇이냐는 격한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미세먼지의 피해자라는 암묵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환경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외부 불경제’ 개념이 있다. 이 개념에 따르면 환경문제는 자유시장경제에서 어떤 사람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시장이 그 피해를 보상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공장 폐수가 그렇다. 강 상류에 위치한 공장에서 폐수를 흘러 보내면 하류 주민들이 피해를 보지만 시장 메카니즘이 자동적으로 하류 주민의 피해를 보상해주지 못한다. 이러한 시장 실패를 교정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게 되는 데 이것이 환경규제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상적으로 환경문제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세먼지는 상황이 좀 복잡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호 얽혀있다. 물론 국경을 달리하여 중국에서 넘어 오는 미세먼지는 논외로 하자.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국내 경제체제에서 미세먼지 발생에 내가 기여하는 바가 한 톨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피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모 종편프로그램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은 그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도 전기를 쓰고 자동차를 끄는 한 미세먼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한 매체에서 이를 아주 평범한 직장인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이 평범한 직장인은 환경문제와 식생활뿐 아니라 건강이나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안다. 자동차도 함부로 끌고 다니지 않고 장거리는 꼭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 직장인은 하루 평균 10㎞ 정도 자동차를 몬다. 한 달이면 300㎞로 아주 준수하다. 그런데 이 정도 자가운전만으로도 초미세먼지를 한 달에 46㎏이나 배출한다. 이를 정화하자면 소나무 90만 그루가 필요하다.”

이것은 어떤가? 미세먼지 때문에 야외운동을 대신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내운동을 즐긴다. 공기청정기, 빨래건조기 등 미세먼지관련 가전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생긴 미세먼지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화석연료를 보다 많이 사용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들이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로 매일 통학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코 미세먼지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공공재에 있어 무임승차(free rider)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미세먼지가 사회적 이슈가 된지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작년 한국의 유연탄 수입량은 1억3152만톤으로 2017년 세운 역대 최고 기록(1억3146만톤)을 갈아치웠다. 석탄 소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보스 포럼은 한국을 인도,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세계 석탄 수요 증가를 이끄는 국가로 규정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낮은 전기료를 유지해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일자리와 우리의 삶의 질 유지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할 거야?”라고 묻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바른 질문은 ”나는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세먼지는 내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불편을 감수하고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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