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과 맞서 싸우던 벼랑 끝에 울려퍼지는 시인의 노래, 현(絃)의 노래

탄금대에서 바라본 충주호.

(동양일보)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진달래 가득한 꽃길에 들어간 것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천지가 온통 꽃들의 무덤이었고 붉게 빛났으며 새새틈틈 향기가 끼쳐왔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 가까이 갈까 망설였지만 푸른 나비처럼 살포시 그대의 품에 안겨 비온 날의 싱싱하고 촉촉한 그 숨결, 햇살처럼 빛나는 그 눈빛, 새벽안개 같은 보드라운 소리를 들으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꽃처럼 나비처럼 햇살처럼 안개처럼 온 몸에 생기가 돌더니 내 삶의 낡은 비늘이 하나씩 떨어졌다. 지금 남녘에선 대지가 트림을 하고 꽃들이 기지개를 펴고 있으니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마음으로 봄을 맞이해야겠다. 그대를 향한 나의 삶은 희망이다. 기적이다. 불멸이다.

탄금대의 백미 ‘열두대’
탄금대의 백미 ‘열두대’

시를 쓰는 일은 매일 아침마다 기침하는 일이다. 마른 대지에 노크하는 일이다. 북풍한설을 녹이고 새순 돋는 신비다. 가슴 뛰는 사랑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탄금대에 오르면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시비가 반긴다. 꽃 피는 대로 열매가 맺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 앞에서 가슴이 먹먹하다. 시인은 사람들의 무디어진 가슴에 꽃을 피우는 마술사다.

권태응 시인은 충주시 칠금동에서 태어났다. 1937년 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인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입학했다. 신문학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갔지만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유학생들에 대한 차별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인들의 부당함에 저항하다가 일본 경찰에 입건돼 퇴학당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재일 유학생들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했다. 적들의 심장에서 말이다. 이 또한 일본 경찰에 적발돼 1939년 스가모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시인은 이듬해 6월에 출옥한 뒤 귀국했다. 투옥생활 중 일본 경찰의 고문에 생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야학을 운영하고 소인극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일어났다. 병세는 악화되고 전쟁통에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었다. 1951년 3월 28일 33살의 청년 권태응 시인은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순수와 저항이라는 두 개의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다. 자연과 풍경의 동시적인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그 속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뿌리 깊었다. 그의 시는 언제나 동요가 되었다. <감자꽃>도 동요로 만들어졌고 “둥둥 엄마 오리, 못 물 위에 둥둥. 동동 아기 오리, 엄마 따라 동동. 풍덩 엄마 오리, 못 물 속에 풍덩. 퐁당 아기 오리, 엄마 따라 퐁당”이라고 노래한 <오리>도 동요가 되어 어린이들의 노래가 되었다.

이곳 탄금대(彈琴臺)는 신라 진흥왕(551) 때 당대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 그래서 탄금대다. 충주호가 탄금대를 감싸며 흐르고 있으니 풍광의 아름다움은 절로 노래가 되고 시심에 젖게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우륵에게는 최고의 무대였던 것이다.

그는 가야국(伽倻國) 사람인데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으며 신라에 귀화했다. 왕의 배려로 이곳으로 와 살면서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이 때 가야금곡은 궁중악이 되었다.

소설가 김훈의 <현의 노래>는 가야금의 예인 우륵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유려하고 밀도 높은 언어로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가야국의 현실과 악사 우륵의 노래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어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현의 노래>는 이처럼 우륵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혼돈을 웅변했다.

소나무 숲의 탄금정에서 층계를 따라 내려갔다. 열두대라는 이름의 절벽이 아찔하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왜군과 싸우던 곳이다. 이곳을 열두번이나 오리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해서 열두대라고 부른다. 신립장군은 이곳에서 8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쳤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 패장의 불명예를 써야했다.

탄금대는 누군가에게는 풍류와 예술의 숲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최전선이었다. 그날의 영광과 슬픔을 아는지 탄금대에 눈발이 날렸다. 강은 짙은 비린내를 풍기더니 기어코 소나무숲으로 들어갔다. 오지에서부터 달려왔을 강물은 바람과 함께 굽이쳤다. 북풍한설에도 제 갈 길을 찾아 나섰다. 흐르면서 닿았고 얼고 또 녹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흐르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나도 머물지 말아야겠다. 가야할 길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하나의 풍경이 되어야겠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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