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기쁨을 누릴 여지도 없이 치안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각계각층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진 때문이다. 이 때 미군정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경찰과 순사를 하던 자들을 모두 재임용하여 치안유지를 위해 일선에 배치한다. 후에 만들어진 반민족특별위에서 처벌하기로 한 일제부역자들을 이승만은 끌어안는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법을 외면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악질적인 순사들이 단 한명도 처벌되지 않게 됨으로써 국민들은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하루하루 마음속으로 쓸어 모으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를 모집하였다. 모집 공고를 보고 젊은이들이 모여드는데 미군정는 신원조회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제재는 고사하고 무감각하기조차 하였다. 완전한 사상의 자유가 요즘 병사들의 휴대폰처럼 군부대 내에서 허용되었다. 따라서 초기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간섭을 받던 좌익인사, 빈곤 노동자, 가난한 소작농 자식들의 편안한 신분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남로당 입장에서 보면 위장 입대를 통하여 좌익열사를 포섭하고 양산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군과 경찰이 국가주도권을 놓고 충돌을 자주 벌인 이유를 경찰과 군의 이러한 변태적 조직 과정에서 찾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 된다.

1948년 제주 4·3은 쉽게 진압되지 않고 있었다. 잔인한 제주진압에 항의하던 김익렬 중령이 여수 제14연대로 문책 전출되었다. 김 중령이 배속되자 14연대는 정부군의 제주 4·3의 폭압진압에 대한 성토 분위기로 충만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4연대로 제주 4·3 진압을 위한 명령이 떨어졌다. 유류탱크에 성냥불을 그어댄 것이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병영 내에 비상나팔이 울려 퍼졌다. 국방경비대 14연대의 병사들은 군영 내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 내걸었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 등을 주장하였다. 반대하는 간부들은 즉시 처결하였다. 다음 날 새벽 전남남로당과 협의도 없이 그들 독단적으로 여수 시내로 밀고 들어섰다. 여수경찰서장, 한민당지부장, 대동청년단장, 등 70여 명을 살해하고 순천의 홍순석 중위의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함께 순천을 장악하여 버렸다.

인가의 대문에 인공기가 꽂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수 순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포고문에서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제거”하라고 적었다. 그 결과 그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여수 14연대 2천 2백여 명의 병사와 1만 3천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슬픈 역사가 기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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