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내 한국·조선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일본 정부의 차별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 학생들을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한 위법 여부를 가리는 법정 다툼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하급심 판결이 나왔다. 후쿠오카(福岡)지법 고쿠라(小倉)지부는 지난 14일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 졸업생 68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750만엔(약 7천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소송 관계자들이 취재진 앞에서 '부당 판결'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쳐 보이고 있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탄압과 저항의 시대 1- 제2기 제1 국면

●민족학교의 설립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을 독립했다. 재일동포들은 즉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그 자녀들에게 조선말과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식민지시대에 억압받던 민족교육의 에너지가 분출한 것이고 그때까지의 동화교육을 일거에 뛰어넘었다.

학교를 세우고, 조선어 교과서를 만들고 재일동포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 부모가 학교를 운영했다. 재일동포들은 그 모든 것을 본국 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뤄냈다. 이는 한민족의 높은 교육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민족의 교육사에 재외편을 둔다면 1항에 기록할 정도로 창조적인 운영이었다. 그러나 민족학교가 일본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이러한 민족교육을 자유로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1948년 1월부터 일본 정부의 탄압이 시작됐다.



●동화교육정책의 부활

재일동포들의 자립적 교육운동에 대해 일본인은 새로운 교육을 어떻게 만들어내야 할 것인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미국 교육사절단의 보고를 기다린다는 허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교육상황 속에서 의욕을 불태우며 민족교육의 설립에 힘쓰고 있던 재일동포들의 모습과 교육에너지에 일본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전쟁에 패배해 의기소침해 있는 자신들에 비해 광복 후 재일동포들의 넘치는 기운에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1946~7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을 중심축으로 하는 동서냉전이 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GHQ(연합국 총사령부)의 지시 아래 미국 쪽에 섰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들과 그 교육의 문제를 자본주의 진영의 입장에서 평가하게 됐다. 그러한 눈으로 민족교육을 바라보면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은 자본주의 진영과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교육으로 비쳤고 이에 검열과 폐지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일본에 순종적인 조선인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그처럼 독립한 조선인의 모습과 활동에 공포감을 느끼고, 그것을 키우는 민족학교의 확산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이들의 독립심의 핵을 뿌리 뽑을 방법을 생각했고, 그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동화교육의 부활이었다.

1948년에 접어들자 이러한 동기에 입각해 GHQ의 지시 아래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교육을 단속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때 모델로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시대의 동화교육정책이다. 민족학교를 폐쇄하고 학생을 일본학교로 전학시키는 것이었다.



●새로운 고난의 시작

이렇게 해서 시작된 민족학교의 설립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은 그 후 1/4세기 동안 계속됐다. 물론 재일동포들은 이 탄압에 맞서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여기에 연대하는 뜻있는 일본인도 나타났다. 이 점은 식민지시대(제1기)와 크게 다른 특징이다. 이렇게 광복 후 새로이 ‘탄압과 저항의 시대’가 시작됐다. 재일동포 교육은 식민지 세대와 형태는 다르지만 다시 새로운 고난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학교교육국장 통지

고난은 1948년 1월에 나온 한 통의 문부성 통지로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GHQ와 미리 의논해 민족학교에 대해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 교육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재일동포 자녀는 의무적으로 일본학교에 취학해야 한다고 통지했다(문부성 학교교육국장 통지).

광복 후의 재일동포들은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옛 식민지 출신자이기 때문에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의 점령 기간은 ‘일본 국적’을 가진 자로 간주됐다. 따라서 그 자녀에 대한 교육도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따라야 할 교육법령이란 교육기본법과 학교법령을 가리킨다. 교육기본(1947.3.제정)은 전후 일본교육의 기본을 정한 기본법이고 ‘개인의 존중을 중시’함과 동시에 ‘민주적이고 문화적인 국가 건설’을 하는 ‘일본국민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다. 학교교육법은 이 목적에 입각해 학교의 제도, 내용, 방법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교육법령은 이처럼 ‘일본국민의 육성’을 목적으로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해 일본어로 수업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일본 국민을 육성”하는 교육인 것이다.

민족학교에 대해서 이러한 성격의 교육법령에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민족학교에 일본인으로서의 교육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일본인에게는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교육이라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재일동포 교육에 적용하게 되면 민족교육을 박탈하는 동화교육이 되어 반민족적·반민주적인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교육은 각각의 민족문화를 기본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명분 아래 동화교육정책이 부활했다. 제1기에는 교육칙어에 입각해 천황제국가에 동화하는 것이었지만 패전(광복)후에는 교육기본법에 따라 ‘민주적이고 문화적인 일본국가’에 동화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는 변하였지만 일본인화하는 내실은 변함이 없었다.



●한신(阪神) 교육 투쟁

광복된 재일동포들은 이러한 국장의 통지에 따를 수가 없었다. 재일동포들은 이를 동화교육정책의 부활이라고 보고, 민족학교를 지키는 대중운동을 일본 각지에서 전개했다. 4월에는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戶)에서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집회를 개최하고 현청(縣廳)과 부청(府廳)을 에워쌌다. 이에 대해 고베에서는 미8군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출동해 집회를 해산시켰다. 오사카에서는 경찰이 출동해 집회를 해산시키던 중 16세의 김태일(金太一)군이 사살됐다. 고베와 오사카에서 일어난 일련의 투쟁을 ‘한신교육 투쟁’이라고 부른다.

재일동포들이 민족교육에 거는 이러한 정렬과 대중운동에 압도당한 일본정부는 GHQ의 허가를 얻어 통지를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민족학교의 운영을 묵인했다. 나는 재일동포 역사에서 갖는 한신 교육투쟁의 의미는 한국독립운동서에서 3.1운동이 갖는 의미에 비견된다고 생각한다.



●민족학교의 폐쇄

그러나 1949년 10월 일본 정부는 정령정책 위반을 트집 잡아 조선인연맹을 해산시키고, 이어 민족학교의 폐쇄를 명령했다. 당시 340여개의 민족학교는 사립학교 인가를 얻은 2개교를 제외하고 전부 폐쇄당했다.

이에 항거하는 학교에 대해서는 경관을 파견해 조선인 학생을 창밖으로 내던지며 폭력적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자행한 방식과 동일했다.

민족학교에서 쫓겨난 재일동포 자녀들은 일본학교로 전학했다. 이제 조선인 교사는 일본인 교사로 바뀌고, 조선어 교과서 대신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했다. 조선인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지 못하고 일본인 아이들 속에서 공부해야 했다. 수업도 잘 따라가지도 못하고 일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휴학하거나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이 급증했다.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를 빼앗기고, 일본에 사는 조선인 아이들은 독립의 기쁨을 박탈당했다.

이는 식민지 교육의 재현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지식인만 저항한 것 외에 보도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 교육의 민주화에 열중해 재일동포 민족학교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교원조합도 항의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이후의 점령기간 동안(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때까지) 민족학교는 폐쇄되고 재일동포 자녀들은 모두 강제로 일본학교에 다녔다. 이는 광복 이후 재일동포 교육이 체험한 최대의 고난이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점차 자기 아이를 일본학교에 취학시키는 쪽으로 태도를 변경하는 부모가 많아졌다. 1955년 이후 민족학교는 재건되었지만, 이 사건을 전기로 재일동포 자녀의 취학 흐름이 민족학교에서 일본학교로 옮겨져 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 내 한국·조선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일본 정부의 차별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 학생들을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한 위법 여부를 가리는 법정 다툼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하급심 판결이 나왔다. 후쿠오카(福岡)지법 고쿠라(小倉)지부는 지난 14일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 졸업생 68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750만엔(약 7천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소송 관계자들이 취재진 앞에서 '부당 판결'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일본 내 한국·조선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일본 정부의 차별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 학생들을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한 것에 대한 위법 여부를 가리는 법정 다툼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하급심 판결이 나왔다. 후쿠오카(福岡)지법 고쿠라(小倉)지부는 지난 14일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 졸업생 68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750만엔(약 7천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소송 관계자들이 취재진 앞에서 '부당 판결'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쳐 보이고 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