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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칼럼 / 출신지 세탁
동양칼럼 / 출신지 세탁
  • 김영이
  • 승인 2019.03.19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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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동양일보 김영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번호판이 마음에 안든다. 지역감정을 없앤다며 번호판에서 지역명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기이한 시책인지 모르겠다. 미국만 보더라도 번호판에 주(洲) 이름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이라고 지역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를 봐도 내가 태어난 고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고향발전을 애쓰는 건 당연하다. 혈연, 지연, 학연 중시를 나무랄 것도 없다. 이러한 자연스런 현상을 인위적으로 단절시키려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 자동차 번호판에서 지역명이 사라진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영·호남을 기반으로 한 뿌리깊은 지역감정 타파를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지역명을 뺀 번호판이 지역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더 할 나위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역감정이 사라지기는 커녕 색바랜 지역색은 오히려 욕 얻어 먹기 십상인 세상이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현실이요, 변할 수 없는 고금의 진리다.

과거의 번호판은 요즘 신세대에게는 다소 생소한 서울가1-1234→ 서울2가1234→서울11가1234→충북31가1234 식으로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역 이름이 들어가 자동차의 ‘출신’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지역 이름이 들어간 번호판은 운전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서울에 차 끌고 갔다가 자신도 모르게 법규를 위반해 교통경찰관에 적발되면 “지방에서 왔는데...”라는 읍소가 통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지역명이 사라진 뒤 번호판 만 봐서는 출신지를 도통 알 수 없다. 번호판이 52가1234, 54루 1094라는 식으로 돼 있어 육안으론 경상도 차인지, 전라도 차인지, 충청도 차인지 구분할 수 없다. 번호만을 보고 ”저 차는 어디 차야“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오죽했으면 지역색을 없애기 위해 자동차번호판까지 동원했겠느냐는 생각에 이르면 이해도 간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떤가. 지역명 하나 없앴다고 지역감정이 사라졌나.

미국과 캐나다 등 외국에선 국가 유공자를 예우하고 애국심 고취 차원에서 자동차 번호판에 유공자 상징물을 새겨 자부심을 안겨준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지역명을 삭제한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9월부터 자동차 번호판이 또 바뀐다. 현재의 7자리 등록번호 용량부족 해소를 위해 8자리로 늘리는 것이지만 여전히 지역명은 배제된다. 지역색 탈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걸로 나타났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지역명을 붙여 ”내 고향은 여기요“라고 자신있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얼마 전 정부 개각에서 장관 후보 출신지를 출신 고교 기준으로 분류했다 해서 논란이 일었다. 물러나는 김부겸 행안부장관이 한 국회의원의 질문에 ‘치졸한 방식’이라고 평가절하했지만 고향을 세탁한다고 출신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진영 행안부장관 후보자는 당시 전북 출신으로 분류됐지만 이번엔 경기고 졸업을 앞세워 서울로 돌아왔다. 태어나고, 자라고, 전북도 정무부지사까지 지낸 최정호 국토부장관 후보자는 금오공고를 다녀 경북 사람이 됐다.

이명박 정부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뼛속까지 서울사람이라는 유인촌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내정 당시 전북사람으로 분류됐다. 6.25전쟁 당시 전북 완주 피란지에서 태어났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태어났으니 고향이 될 수 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너무 치졸한 고향세탁이 아닐 수 없다.

출신지가 고무줄처럼 오락가락하는 데는 능력이나 전문성보다는 출신지를 중시하는 인사관행과 해당 지역 주민들의 무리한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 반영이기도 하다.

지역언론도 개각 명단에 자기 지역출신 인사가 없거나 적다고 해서 지역 홀대라고 핏대를 올릴 필요도 없다. 대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그 인재는 국가를 위해 일을 하도록 감시하고 지원하는 게 할 일이다. 한 나라의 장관쯤 돼서 고향 일이나 챙기는 소인배 역할에 그친다면 나라와 국민에겐 불행이다. 고향 세탁, 자동차 번호판과 같은 치졸한 짓은 더 이상 안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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