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시인

(동양일보) 지난주 아주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다. ‘예술의 섬’으로 알려진 일본 ‘나오시마’를 둘러보는 코스다. ‘특별한 여행’에 대한 기준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거나 여행사의 과장된 광고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긴 해도 이번 여행은 좀 특별하다고 할만한 요소가 몇 있다.

우선 1차로 다녀온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마련된 ‘앙코르 여행’이란 점이다.

사실 건축가나 미술애호가들에게는 버킷리스트라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곳이라 한다.

그 방면에 안목이 깊지 못한 필자로서는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는 일정이었지만 함께 간 일행들이 여행의 맛과 멋을 살려줬다. 송씨 일가, 이씨 일가로 통하는 12명의 가족 팀이 화목한 우애를 보여줬고, 4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여행 내내 끊이질 않았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도 있었고,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일행 중에 시각장애인 L씨가 특별했다. 부인과 함께 오긴 했어도 완전히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으로서 ‘빛’을 주제로 한 미술관 투어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사업실패 후 급격히 나빠진 시력으로 인해 완전한 암흑 속에서 지낸 지가 16년째, 이제 70줄에 들어선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기적 같은 회복을 바라거나 ‘빛’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더 보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다시 사는(?) 연습 같은 것이라 했다. 수없이 봐 왔으나 가려져 있던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을 닦는 일이라고 했다. ‘눈 뜬 자‘의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며 무심코 흘려보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기적 같은 일인가를 생각해보라는 충고로 들렸다. 어둠 속에서 몇 걸음을 떼는 일조차 전적인 신뢰와 배려 속에서 이뤄진다는 사실도 그를 통해 알았다. 그가 이번 여행에서 추구하는 ‘빛’의 실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 흐릿한 구름 사이로 햇살이 환하게 퍼져 내려오는 풍경을 보고 있다. 구름을 벗어 난 햇살은 체에 걸러진 가루처럼 날려 군데군데 피어있는 수련의 연못 위에 내려앉는다. 햇살의 알갱이들이 각기 다른 농도의 물감과 어우러져 빛의 다발을 이루면서 길을 내고 있다. 연못은 미세한 움직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연작 ‘수련’ 앞에서 느낀 감상이다. 여전히 그가 내 옆에 서서 모네의 ‘수련’을 듣고 있다. 눈이 있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얼치기 안목보다 정제된 암흑 속에서, 심연까지 내려간 긴 침묵 속에서, 때론 관람객의 호흡을 느껴가며, 상상 속의 미술작품을 맘껏 가슴에 품었을 그의 예술적 감흥이 훨씬 값져 보였다.

‘빛과 콘크리트’의 작가, 세계적인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지어진 세계 유일의 땅속 미술관인 ‘지추(地中)미술관’도 온통 ‘빛’이었다. 빛이 시멘트를 감싸며 공간을 만들고, 만들어진 공간에 자연의 온기를 담는 ‘빛의 공간’은 더 이상 강렬한 직선과 투시의 무엇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을 잇는 ‘길’이라는 것을 안도 다다오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시각장애인 L씨가 모든 일정을 소화해 내고 우리 앞에 섰을 때 우리를 특별한 여행으로 이끌어준 그에게 감사했다. 이번 ‘빛의 여행’에 최적의 가이드를 만난 것도 행운이다.

최선을 다하는 프로는 언제나 아름답다.

빛의 3원색은 빨강, 파랑, 초록이다. 독립적이고 근원적인 3원색이 서로 겹치며 모든 색을 만들어 내지만 하나가 되는 교집합은 흰색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따뜻한 위로의 색이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특별함을 얻기 위해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빛’의 여행에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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