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추풍령중학교 교사)

(동양일보) 한 학생이 책을 읽었다. 성소수자의 그 부모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커밍 아웃 스토리(한티재, 2018)>라는 책이었다.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룬 책을 골라 온 것도 특별했지만 평소 생활로 짐작해 볼 때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학생이라 더욱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그 학생은 신중하게 책을 읽고는, ‘그래도 안 바뀔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책을 반납했다. 쓸쓸한 표정도 함께. 국어 교사를 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런데 그 학생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까(혹은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궁금해졌다.

한국 사람들은, 즉각적인 이득이 오지 않는 관계는 무성의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이해 관계 지향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이해 관계 지향의 한국 사람들에게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은 이득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성소수자들은 자연스럽게 ‘타자화’가 되고 일상에서 덜어내어진다.(‘배제’)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일은, 이런 ‘배제’들을 예측하고 감내하겠다는 점에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타자화’된 시선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안 바뀔 거예요.’라고 쓸쓸하게 말하던 그 학생의 마음은 이런 현실에 깃든 것이다. ‘너 게이냐.’ 등의 혐오발언이 일상화된 학교를 벌써 10년 가까이 겪고 있는 학생에게, 학교는 배움과 성장의 공간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폭력을 감내해야하는 공간이었을 터. 주변에서 공감하고 도움을 준다고 해도 이런 편견을 이겨내며 생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커밍 아웃 스토리>의 한 꼭지를 쓴 가족과 인연이 있는데 성별 정정과 개명 신청을 위한 재판에 탄원서를 쓰면서 당사자들의 아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기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여 ‘나답게 살겠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그동안 학교는 무엇을 해왔던가 몹시 부끄러웠다. 학교가 가치중립을 외치며 ‘당장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어떤 학생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에서 곤란을 겪는다. 학교가 일부의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면, 학교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며칠 전 서울교대 남학생들의 집단 성희롱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 대구교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국 어디에서나 동기나 후배들을 ‘얼평’, ‘몸평’을 하는 건 닮아있고, 이런 일들이 어떤 죄의식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정의 노력이 없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성소수자들을 ‘타자화’한 장치는 여기도 작동하여 여성인 동료들을 ‘타자화’하고 ‘성적대상화’하였다. 꽤 많은 교사들이 꽤 헌신적인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학생들의 좋은 삶을 책임지지 못했다. 개인의 실천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학교의 ‘구조’를 상상하여 함께 만들어야 하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잊을 때 결국 우리들의 삶은, 전부 망가진다. 학교는, 모든 교과 교육이 인권을 증진하고 다양성을 존중하여 서로 건강한 연결들이 복원될 수 있도록 재구조화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12년의 일상이 바뀌어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함께 배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학교 밖 논쟁거리들이 학교 안에서 토론되어야 하고 혐오와 배제에는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런 한걸음 한걸음이, ‘그래도 안 바뀔 거예요.’라고 쓸쓸하게 이야기하던 학생에게 보내는 우리 어른들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도 있음을, 더디게 변화할 줄 알면서도 말하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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