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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칼럼/ 율곡이 화양동 선유동 쌍곡을 찾지 않은 이유⑪
동양칼럼/ 율곡이 화양동 선유동 쌍곡을 찾지 않은 이유⑪
  • 동양일보
  • 승인 2019.03.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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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동양일보) 용의 영기(靈氣)는 화양구곡 선유구곡에만 서린 게 아니다. 지금 충북 괴산군 칠성면 쌍곡에도 본래 용의 기가 서려있다. 그를 알고 그를 받들러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재응(鄭在應 1764~1822)이다. 용을 알아보는 감식능력인 지룡지감(知龍之鑑)을 구비한 고식군자(高識君子)는 용력을 구곡이라는 문화산수(文化山水)로 창조한다.

정재응은 용의 기를 받고 영조(英祖) 갑신년인 1764년 4월 5일, 지금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사정리(沙汀里)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의 꿈에 황룡(黃龍)이 집으로 들어와서 이름에 용(龍)자를 넣어서 20세까지 썼다. 이런 내용은 그의 문집인 『잠재집(潛齋集)』,「가장(家狀)」에 실려있다. 자(字)인 용경(龍卿)은 용을 숭상하는 의식을 담은 것이다.

정재응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조선조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鄭澈 1536~1593)의 8대 후손이다. 정재응의 4대 선조 정준(鄭濬)은 정호(鄭澔 1648~1736)와 형제다. 『송강속집(松江續集)』, 「봉증군회구계 윤경희(尹景禧)삼수(三首)」 중 제1수를 보자. “아이가 말하기를, 지리산 화개의 쌍계동에 고운선생이 은거하여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거처할 집을 지었는데 쌍계라는 이름이 우연히 같아, 여기 괴산 쌍계산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 정재응의 『잠재집』, 「차춘실운 사수」 중 제2수에도 이런 사실을 언급했다.

정재응은 송강의 뜻을 계승실현하기 위해 1811년에 지금의 충북 괴산군 칠성면 쌍계리(雙溪里)로 이주했다고, 「가장」에 기술돼있다. 그는 효의 기본인 ‘선계선술(善繼善述)’을 실천한 것이다.

정호는 지금 쌍곡 소금강 근처에 축요당(祝堯堂)이라는 건물을 짓고 바위를 화수암(華叟巖)이라 이름을 붙였다. 신정하(1680~1715)가 「유쌍계기(遊雙溪記)」와 「축요당기」에 이런 내용 등을 기술했다. 괴산군수를 지낸 심제현(1661~1713)이 1704년에 쓴 『죽재폐추(竹齋弊箒)』, 「괴강록」에 지금 쌍곡 절말에 이계사(離溪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연풍현감을 지낸 조유수(1663∼1741)가 1707년에 지은 「쌍계화수암동사중왕방」를 읽어보자. “산의 모습은 어두워지자 더욱 아름다워지는데, 미인(美人)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것 같네.”위의 시에서 조유수는 쌍곡의 수려한 산수미를 미인에 비유하여 산수평론을 했다. 조귀명(1692~1737)은 「담헌애사」에서 이하곤(李夏坤 1677~1722)은 산수평론을 잘 했다고 평했다. 오원(1700~1740)이 「호좌일기(湖左日記)」에 1723년 3월 28일 쌍곡을 유람했다고 했다. 이렇듯 쌍곡은 산수가 수려하여 시인묵객들이 탐방하고 시문을 남겼다.

정재응은 쌍계구곡을 정하고 용을 모셨다. 쌍계구곡 제1곡은 회룡소(回龍沼)으로 보인다. “용이 돌아치는 못 위에 고기잡이배 떠 있고, 아래로 삼풍(三豊)이 있으며 하나의 시내를 띠고 있네.” 지금 호롱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호롱수라 불려지는 곳으로 보면 된다. 회룡소가 옳다. 김위수(金衛銖1896~1972) 『위재유고』에 1949년 「영쌍계회룡소유회」, 이복(李馥1911~2002)의 『학은만고(鶴隱漫稿)』 305면에도 ‘회룡소(回龍沼)’라고 기술했다. 그 상류에 용추(龍湫)도 있다.

2018년 07월 12일 목요일 제17면 신문기사를 보자. 「괴산군 쌍곡구곡, 기암절벽·노송…퇴계 이황도 푹 빠진 곳!」 “괴산군 쌍곡구곡 피서지 각광…수려한 경관 한폭 동양화같아.…이곳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당시 수많은 유학자와 문인들이 쌍곡의 산수경치를 사랑해 이곳에서 소요했다.” 2018년 11월 16일 신문기사를 보자. “동양화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충북 괴산의 쌍곡구곡. 조선시대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풍류를 아는 수많은 문인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전해진다.” 퇴계가 이 사실을 알면 왜곡했다고 대노질책할 것이다. 퇴계는 화양동 선유동 쌍곡에 오지 않았다. 쌍곡을 널리 알려 관광수입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는 가상하다. 왜 하필 퇴계인가?

정재응은 우암의 5대 후손인 송환기(1728∼1807)를 찾아가서 수학했다. 정재응도 주자 율곡 우암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철저히 계승했으며 용의 원력을 받고 탄생했다. 율곡은 16세기에 영감(靈感)인터넷의 고수요 용기(龍氣)지능이 탁월하여 거의 전국을 관장했다. 그래서 율곡은 쌍곡을 찾지 않았다. 용의 원기를 받고 태어난 정재응이 알아서 쌍계구곡을 잘 조성운영했다. 이렇듯 문화산수인 구곡은 율곡이 절대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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