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사람살이라는 게 말여, 먼 데서 보면 아무 근심걱정 없이 기쁨만 가득한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도 않아서, 은근히 속 썩이는 일이 많고 내놓고 아옹다옹하는 일이 많다지?” “그려, 그래서 말 만들어내는 유식한 사람이, 인생은 멀리서 보믄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믄 비극이라나 뭐라나 했다는 거 아녀.” “아니 근데 그 말이 시방 왜 나오는겨, 누구 네가 아니믄 누가 그렇다는겨 뭐여?” “그 머룩이네 말여, 그 집이야 말루 겉으루 보기엔 아무 일 없이 조용한 것 같지만 그 머룩이 땜에 은근히 속 깨나 썩이는 모양여” “왜, 무슨 일이 있는감 또?” “제 엄마 뼈 빠지게 여름내 품 판 돈을 우격다짐으로 달래서 가지고 나갔다잖어.” “또, 왜 뭐할려구?” “우리 집사람이 경로당에서 길례엄마한테서 들었다면서, 지난 갈에 아랫녘에서 이사 온 집에 갔다 줬다는겨. 처음 이사 와서 어려울 거라며 보태 쓰라고.” “뭣여, 한동안 빤하더니 또 발동 걸렸구먼. 못 말려 못 말려.”

나이는 서른여섯이나 된 놈이 군대도 갔다 왔다. 그런데 아직 미장가다. 어수룩해 보이는 것이 사람은 좋아 보인다. 그런 사람이 대개 그렇듯이 실속이 없다. 얼마나 헙헙하고 희떠운지, 제 부모는 그러한 자식놈 장가보내 손자 애들 보려고 열심히 농사일 하고 남의 집 품팔아가며 근근 돈을 모으는데 그걸 알려서 남을 돕는다고 주며 생색을 내는 것이다. 다 자기 집보다 형편이 나은 집이다. 저 지난해에는 더 잘 살아보겠다고 강원도에서 찾아든 밭 가운뎃집에 제 엄마 졸라서 통장에서 돈을 빼 갖다 주더니, 지난해에도 느닷없이 쓸 데가 있다면서 또 제 엄마한테 돈을 달래서 가져갔는데 알고 보니 서울서 전원생활 하러 온 산마루 집엘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그 서울 양반이 집에 찾아와서 고맙다면서 그 젊은이 꽤 삽삽하다며 칭찬을 늘어놓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평소 훌 번들한 말솜씨하며 실없이 희떠운 짓을 하여 돈이나 물건을 주책없이 써버리는 사람이라 동네사람들은 일찍이 그를 ‘희뜩머룩이’라 했던 것인데 이건 부르기가 길다 하여 뚝 잘라 그냥 ‘머룩이’라 일컬어 오는 터이다.

“그 녀석 참 정신 못 차리는구먼. 시방 그 나이에 장가도 못 들고 핀둥핀둥 놀고먹는 주제에 잘 살고 있는 남 걱정할 처지여 참 딱도 하이.”

동네아낙네들도 그냥 있질 않는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머룩이 그 젊은 애야 말로 사람 마들려면 온 동네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할 판 아녀. 워뗘, 난 그리 생각하는디?” “왜 아녀, 저리 줄곧 뒀다간 사람 버리겄어. 온 동네가 울력해서 무슨 수를 써야제.” “이제나 저제나 두고 봤더니만 이건 멀쩡한 사람이 애 때보다도 더 덜 떨어져가니 남일 같질 않는구먼.” “그래서 하는 소린디, 하는 일은 빨리 하고 쉬는 일은 미루랬다고 말 나온 김에 바깥어른들한테 얘기해서 얼른 머룩이 불러 다스려야 할 것 같어.” “그러게 말여 모두들 집에 가거들랑 영감들한테 얘기해서 어떻게 좀 얘기해보라고 하여 들!” 이날따라 경로당 말분위기가 무거웠다.

안 사람들의 말을 들은 바깥영감들이 경로당 남자방에 모였다. “여게 허서방, 머룩이한텐 연락해 놨제?” “했제. 저녁 먹구 일곱시까지 오라구 했응께 오겠제.” “호랭이두 제 말하믄 온대더니 저기 문밖으루 꺼들꺼들대며 오는 게 보이네.” 모두들 그가 오는 걸 보며 한심해하는 표정이다. 그는 문을 드르륵 열면서 빙글빙글 웃는다. 철없는 애송이 같다. “무슨 일 있으셔유. 불러서 왔시유.” “무슨 일? 있지 있구 말구 아주 큰일일세.” 노인회장이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머룩일 마주 앉힌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네를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아주 활달하면서도 온순해 보이네. 듣자하니 타지에서 들어온 새사람들에게 내 것을 주면서 그렇게도 환대를 한다니 우리 동네를 대표해서 고마운 일일세.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다 형편이 낳은 사람들이야. 자네가 벌어 돕는다면야 누가 뭐라 하겠냐만 부모가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그들에게 환심을 산다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네…”

노인회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희뜩머룩이의 머리는 자꾸 수그러들고 훌쩍훌쩍 콧물을 깊이 빨아들이는 소리가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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