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제4회 노년철학 국제회의를 되돌아보며



가마타 도지(鎌田東二)

교토대학(京都大學) 명예교수

조치대학(上智大學) 그리프 케어 연구소 특임교수



머리말: 제4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와 근본주지



한국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에서 개최된 ‘제4회 노년철학 국제회의’ (주최: 보은군청, 주관:동양일보·동양포럼)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이 국제회의는 3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국제회의의 테마는 ‘노숙년세대· 중장년세대· 청소년세대: 3세대 상화· 상생· 공복 사회를 향하여’이었는데 이 ‘3세대 상화· 상생· 공복’이라는 주제는 지속가능한 풍요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와 되는 것이다.

주최자 측의 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 주간은 본 국제회의를 기획하게 된 근본주지를 ① 활고개신(活古開新), ②활지개천(活地開天), ③활로개래(活老開來)에 있다고 밝혔다. 옛날의 좋았던 전통을 살리면서 새로운 상황을 개척하는 것. 구체적인 지상의 영위를 살려서 미래와 세계를 향하는 큰 천공(天空)을 개척하는 것. 노년철학을 심화시키고 발굴함으로써 노년세대를 살리고 현상을 타개하며 미래로 이어가는 것. 그리고 ‘활로(活老)’의 방식으로 ①성로(省老, 늙음을 성찰하는 것), ②개로(改老, 늙음의 라이프스타일 ·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 ③연로(連老, 노년들이 연대하고 노소의 세대간 계승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는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이하의 보고와 논의는 40년 동안 내가 제창해 온 ‘옹동론(翁童論)’을 핵으로 김태창 주간이 제시한 국제회의의 기본방침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1. 옹동론(翁童論)—어린이와 노인의 정신지(精神誌)



나는 종교철학과 민속학과 비교문명학을 전공해 왔으며, 지금까지 노인과 아이가 표리일체이고 상호보완적인 생명존재라는 인간학적 명제를 <옹동론(翁童論)> 4부작으로 저술했다. <옹동론 —어린이와 노인의 정신지(精神誌)—> (新曜社, 1988), <늙음과 죽음의 포크로어 —옹동론Ⅱ> (동, 1990) <엣지(edge)의 사상 —옹동론Ⅲ>, <옹동(翁童)의 코스몰로지 —옹동론Ⅳ> (동2000년)의 4권이다.

이번 국제회의는 이 <옹동론> 4부작의 문제제기를 ‘노소동행(老少同行)’ 내지 ‘노소동행동락(老少同行同樂) · 공락공복(共樂共福)’이라는 포괄적인 시각에서 짚어보고 노인과 아이의 상관성을 논의했다. 나는 첫 번째 발표자로서 ‘미래를 여는 노인과 어린이의 이야기 힘’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내 발제의 근본은 아이는 단지 아이에 지나지 않는지, 아이가 실은 그 깊숙이 노인성을 간직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역전된 물음이었다. 그 관점의 단서를 과거의 철학사상과 일본의 신화와 의례와 민속 등에서 찾아내고, 거기서 다음과 같은 ‘옹동론’의 명제를 세웠다.

아이와 노인은 ‘죽음으로서의 탄생(영적靈的 죽음=육체적 탄생)’과 ‘탄생으로서의 죽음(영적 탄생=육체적 죽음)’이라는 역대응(逆對應)하는 존재이면서 ‘늙은이(翁)를 내재화시킨 어린이(靈翁)’라는 영적 과거의 그림자를 간직한 아이와 ‘어린이(童)를 내재화시킨 늙은이(靈童)’이라는 영적 미래의 그림자를 간직한 노인으로 서로 영성의 축을 공유하고 상보적으로 연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옹동(翁童; 노소老少)의 생명적 연속성과 영적 계승관계를 주장했다. 즉 늙은이는 어린이를 내재화시키고, 어린이는 늙은이를 내재화시키고 있다고 문제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노소인간학의 입장이지만 예로부터 철학적· 종교적으로는 플라톤의 생사관이나 윤회전생설이나 환생사상, 융의 심층심리학에서 이른바 동자신(童子神)이나 노현자(老賢者)의 원형론으로 표명되어 왔다. 이러한 비연속의 연속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손’의 우리가 동시에 ‘선조’이기도 하다는 역전된 발상도 성립된다. 자손 즉 아이는 선조의 변용한 모습이다. 따라서 거기서는 조상숭배나 조상공양은 필연적으로 자손숭배나 자손공양이 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조상공양의 현재형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한 사상구조가 일본문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선주민문화 속에 잠재되고 있다고 나는 지적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오키나와(沖繩)의 민속에는 ‘화간다(ファーガンダ)’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화(ファー, 잎사귀)’와 ‘간다(カンダ, 덩굴· 줄기)’의 합성어인데 거기에는 인간존재가 ‘화간다’적인 연속성 속에 있다는 생명직관이 있다. 또 거기에는 조부모가 손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 생명이라는 것은 사실 잎사귀와 덩굴이나 줄기의 관계와 같이 뗄 수 없는 연속성 속에 놓여 있다. 분리되고 독립해 보이더라도 그 독립성은 사물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명관· 인간관이다. 거기에는 직선적으로 보면 아이가 성장하고 마침내 노인이 되지만, 그 노인은 다시 아이로 되돌아간다는 생명연쇄와 순환 속에 있다. 그리고 선조는 자손이 되고 자손은 조상이 된다. 거기에 혼 내지 영성의 에코로지, 스피리츄얼 에코로지가 직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조부모가 손자가 된다거나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사상은 고대 호족인 후지와라씨(藤原氏)나 에도시대(江戶時代)의 도쿠가와 장군가(德川將軍家)의 가계도에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거기서는 할아버지 이름의 한 글자가 1대를 사이에 두고 손자의 이름에 계승되고 있다.



  藤原師輔―公季―実成―公成―実季―公実―通季

  藤原道長―頼通―師実―師通―忠実―忠通―基実―基通―家実

  松平信忠-清康―広忠―(徳川)家康―徳川秀忠



바로 가계가, 구체적으로는 조부모와 손자가 ‘화간다(잎사귀와 줄기)’로써 격세 연속된 사례이다.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선조의 이야기>(1946)도 위 사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거기에 잠재된 일본인의 ‘환생’ 사상, 조부모가 손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민속사례와 민속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 일본의 민속학적 전승에 ‘7세까지는 신의 일종’이라는 동자 신성관(神聖觀)과 ‘60(환갑)을 지나면 조상으로 돌아간다’는 노인 신성관의 양극이 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본다.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에 성립되었다고 생각되는 하치만(八幡) 신앙의 텍스트인 <하치만 우동훈(八幡愚童訓)>을 보면 하치만신은 처음에는 ‘늙은이(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음에 ‘어린이(童)’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형(異形)’의 모습을 한 ‘단야옹(鍛冶翁; 대장장이 늙은이)’이 세 살의 ‘소아(小兒)’ 모습으로 변하면서 ‘칸누시(神主; 신도 신관)’인 오오가노 히기(大神比義) 앞에 나타나 자기가 오우진천황(應神天皇)임을 밝히는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음 세 가지 세부 표현과 구조이다.



①늙은이 모습의 하치만신(八幡神)은 ‘단야(鍛冶=[일본어로]가지=가지기도加持祈禱) 옹’이라고 불린다.

②이형(異形)의 노옹신(老翁神)이 세 살 어린이로 변신가현(變身假現)하여 ‘대나무 잎’ 위에 타고 나타난다.

③ 이 유동신(幼童神)이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신탁을 내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변환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점이다. 그 ‘어린이’가 신령이 내리는 ‘대나무 잎’ 위에 올라타 현현(顯現)한다. ‘단야옹’의 ‘단야’ 기술은 단순한 제철(製鐵)의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술적인 심신변용 기법이다. 즉 그것은 ‘가지=가지기도’인 것이다.

그래서 세 살 동자가 대나무 잎 위에 나타나게 되고, 거친 돌을 정밀하고 단단한 쇠로 만드는 단야의 기술이 연금술적인 심신변용 기법의 표현이 된다. 실제로 <하치만 우동훈>에는 중생의 ‘거칠고 조악함(麤惡)’은 마치 ‘광석(鑛石)’과 같아서 아직 ‘쇠붙이로서의 진면목(眞金)’을 드러난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소치주치(燒治鑄治)’하고 ‘악용(惡用)의 구진(垢塵)’을 쓸어내고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명덕(明德)’을 밝혀 ‘제재여락(除災與樂)의 거익(巨益)’을 주는 기술이 바로 ‘단야=가지(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야’란 중생의 광석과 같이 거친 심신을 연마하고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의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명덕인 ‘쇠붙이로서의 진면목(眞金)’을 드러내는 ‘단야’의 술(技‧ 業)이 된다.

여기에 신성(神性)의 표현으로써의 ‘옹동신체(翁童身體)’의 위상을 읽어낼 수 있다. 거기서는 ‘늙은이(翁)’가 ‘지혜(叡智)’의 상징이며 ‘어린이(童)’은 ‘생명’과 ‘힘’의 상징이다.

제아미(世阿彌)는 <풍자화전(風姿花傳)>이나 <하나가가미(花鏡)> 안에서 ‘늙은이(翁)’와 노인을 모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노(能; 사루가쿠申樂)이라는 예능의 근원과 극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기라는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노(能) 연기자는 60 환갑을 지나 70대에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 기예에 풍격과 숙련이 더해지면서 한층 매력과 맛이 늘어나는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물론 80세를 넘어서 무릎이 아파지고 기거에 고생하는 인간문화재의 명수도 있으나 그래도 다치마이(立舞)나 우타이(謠)에서는 뛰어난 기능과 풍격을 보인다. 또한 컨템퍼러리 댄스의 세계에서는 오오노 가즈오(大野一雄, 1906- 2010)는 100세를 넘어서도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라 갈채를 받았다.

이러한 사례는 서양의 댄스계에는 없다. 서양에서는 댄서에게 늙음은 치명적이다. 이에 대해 일본 등의 비서양(非西洋) 사회에서는 오히려 늙음과 경험과 연륜을 쌓아야 춤의 ‘명수’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여겨져 왔다. 여기에는 늙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인간관의 차이도 배경에 깔려 있다. 젊음을 우위에 두는 문화와 늙음에 가치를 보는 문화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14년 5월 도쿄독일문화센터에서 ‘늙음과 춤’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구미 문화권에서 ‘늙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지만 이제 이상적인 신체의 체현을 희구해 온 무용에서 ‘늙음’의 주제를 설정하는 것이 미학적 사회적 인간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진시키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이 기획 취지이다.

독일에서는 고령이 되어도 계속 춤추는 댄서를 안무가 피나 바우슈가 대표작 ‘봄의 제전’ 등에서 등용했다. 일본의 이와테현(岩手縣) 히라이즈미시(平泉市)에 있는 천태종(天台宗) 모쓰지(毛越寺)의 ‘연년(延年)의 춤’에서는 노녀(老女)의 탈을 쓴 주지스님이 왼손에 부채를, 오른손에 방울을 들고 때때로 그 방울을 울리면서 반신을 구부려 축복의 춤을 춘다. 연극평론가의 와타나베 다모쓰(渡邊保)는 일본의 ‘기예’에는 늙음을 연기하는 방법론이 있어 그것은 본명· 예명(藝名)· 역명(役名)의 ‘세 가지 나’를 하나로 어울린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부키(歌舞伎) 연기자가 ‘제12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 등으로 습명피로(襲名披露)하는 데에는 선조로부터 전래된 몇 대나 되는 신체를 등에 업고 성립된다는 신체관이 있고, 이것이 바로 “이미지를 신체를 매개로 공간에 그려내는” 일본 무용 기예의 전통이다. 와타나베 다모쓰와 대담한 90세의 인간문화재인 일본 무용가 하나야기 도시나미(花柳壽南)는 “100세가 되어도 앉아서 춤출 수 있는” 무용의 세계를 실연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참가한 구미의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올해 2월에는 이 국제 심포지엄을 바탕으로 논문집 <늙음과 춤(老いと踊り)>(勁草書房)이 출판되고 나도 그 중에 1장을 담당했다.







교토대학(京都大學)의 종교철학자 우에다 시즈테루(上田閑照)는 임상심리학자인 고(故)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와의 대담 속에서 두 어린이론을 전개했다. 우에다에 의하면 우리 속에는 항상 두 어린이가 있다. 하나는 겉의 어린이고, 또 하나는 속의 어린이다. 겉의 어린이는 나이에 걸맞게 변화해 가지만 속의 어린이는 변함이 없다. “세살 때 혼은 백세까지(본래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와 같은 뜻의 일본 속답─옮긴이)”는 속담을 우에다 식의 통찰로 해석한 흥미로운 생각이다. 나도 ‘옹동론’ 안에서 비슷한 생각을 전개한 바 있다. 우에다와 다른 점은 나의 생각이 어린이 안에도 노인이 내재되고 노인 안에도 어린이가 내재된다는 점이다.

근년에 태내기억(胎內記憶, intrauterine memory)이나 전세기억(前世記憶)을 가지는 아이들의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소아과 의사인 이케가와 아키라(池川明)는 태내기억을 가지는 아이들이 이구동성에 하는 말이 “세상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약 20년 전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머니를 돕고 싶다. 내가 태어나는 것으로 어머니가 행복해지니까”라고 말했었는데 요즘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라든가 “우주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라든가 말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기상천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어린아이가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세계에 어른도 노인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린이는 감수성과 생명의 말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 노인은 경험과 지혜의 말을 가질 수 있다. 그것에 의해 인생경험과 생로병사에 관한 생사관적 통찰을 포함한 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역사의 의미와 예지를 짐작할 수 있다. 어린이와 노인의 이야기하는 힘은 미래에 희망과 통찰(지혜)을 준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은 7대 앞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문화를 가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역사를 꿰뚫고 연결시키는 눈길과 의사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약 40년 전부터 ‘옹동론’이라는 노인과 아이를 대(對) 관계로 보는 시각을 제창하고 노유(老幼)가 일체화된 ‘옹동시설(翁童施設)’의 건설과 운영, ‘옹동 놀이’라는 문화 창조의 필요성을 외쳐왔다. 그러한 나의 <옹동론>에 공감해준 정신의학자 히라이 노부요시(平井信義, 1919-2006)는 <유년기와 노년기 ̄자전적 노인발달론>(太郎次郎社, 1988)에서 아동· 노년정신의학의 시각에서 “노년기에도 발달이 있다. 유년기에 못된 장난· 반항· 싸움· 익살· 장난이 많았던 아이는 자발성이 발달하고 의욕이 자라고 죽을 때까지 생기 있는 생활을 보낸다. ‘노(老)’ 속에 ‘유(幼)의 마음’이 있고, ‘유(幼)’ 속에 ‘노(老)의 마음’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년을 풍요롭고 창조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동심(童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심(老心) 속에 동심(童心)이 있고, 동심 속에 노심이 있다고 히라이는 말한다. 아이와 노인은 탄생과 죽음의 양단에 있다. 즉 생존의 엣지(edge)를 살고 있는 존재다.

도쿠시마현(德島縣) 요시노가와시(吉野川市) 가와시마쵸(川島町)에서는 ‘시민 주도의 새로운 도시 만들기 교사(校舍)가 없는 학교’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마치 ‘옹동론’을 실천한 듯한 ‘유노통합 케어’가 이루어지고 있다. 노인시설의 치매증에 걸린 분들과 지역의 어린아이와 보호자가 젊은 어머니의 삼자가 협동하는 ‘유노통합 케어’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계촌락이나 지역소멸이 문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유노포괄 케어’는 앞으로 ‘지역포괄 케어’의 핵심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유노통합 케어’의 실천을 일본이나 동아시아에서 실현해가는 것이 미래를 개척하게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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