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옛날 성황당은 마을 뒷산에 적군이나 재앙을 방비하려고 축성을 쌓았던 것인데, 점차 마을의 재앙을 막고 사람들의 안녕을 기도하는 빔터로 변모하면서 서낭당이라고 더 많이 부르게 되었다. 서낭의 낭(娘)은 아가씨나 어머니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계사회의 문화 영향의 일부로써 삼신할머니의 개념까지도 함의하고 있다.

사리면 송오리에는 큰 고개 성황당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거나 어려움과 재앙 혹은 슬픔을 물리쳐 달라고 빌러오곤 하였다. 오래된 소나무들은 우두커니 서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송오리 혹은 노송(老松)리라 불리고 있는 만큼 오래된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애야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제 3년 상을 마쳤으니 너를 놓아 주마. 꽃다운 나이에 내 어찌 너를 청상으로 만들겠냐.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에요 어머니 그냥 어머니와 살겠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낭당에 앉아 한없이 울음을 받아내고 있었다. 지난 동제 때 서낭당에 걸어둔 새끼금줄이 바람에 사륵이며 떠나보내려는 시어머니와 떠나지 않겠다는 며느리 마음을 얽어매고 있었다. 갈대숲은 언제부터인가 산마루를 딛고 오르는 바람을 만나면 슬픈 청년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손수 싼 보따리를 며느리의 가슴에 밀어 넣고 등을 떠밀었다.

곽씨(당시 22세)는 신혼의 단 꿈에 젖어 있었다. 서울에서 몇 해를 걸쳐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느라 고생한 덕분에 지금은 어엿하게 사리 장터에 양복점을 열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서 재봉틀을 손수 사가지고 오셨다. 손님이 많아 양복을 미처 지어 대지 못했다. 신혼생활이 너무나 달콤하고 신나고 행복하기만 하였다.

어느 날 이름도 생소한 “보도연맹”가입해야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전향자들이 대부분 가입되고 있었는데 규모를 키우는 과정에서 의무가입 대상자가 광범위하게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좌익과 관련이 없어도 가입되었다.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 인원이 떨어지기니까 비료나 배급의 혜택을 준다고 회유하여 사람들을 가입시키도 하였다.

곽씨에게도 가입하라는 권유가 떨어졌다. 일테면 서울의 객지 바람을 쐬었으니 틀림없이 빨갱이물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자 도민증대신 보도연맹증이 지급되었다. 공민권이 발탁되고 요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디를 갈 때는 반드시 지서에 신고하여 허락을 받아야 하였고 이를 피해 이사 가는 일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지서에 가서 교육 점검 도장을 받아야 하였다.

6.25가 발발하였다. 갑자기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였다. 피난을 가야한다고 모두 대비하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교육이 소집되어 곽씨는 아무 의심 없이 지서에 갔다가 트럭에 실려가 7월 7일 증평양조장에 갇히게 되었고, 끝내는 7월 9일 옥녀봉으로 끌려가 희생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이 시체를 수습하여 선산에 22세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묘를 지었다. 꽃다운 그의 젊은 아내는 매일 산소를 오르내리며 눈이 붓도록 울었다. 시어머니는 이제 3년 상을 마쳤으니 새 삶을 찾아 떠나라고 보따리를 손수 챙겨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서낭당 고갯마루에서 이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 젊은 새댁은 어디 있을까? 살아 있으면 연세가 90이다. 그녀는 유족이면서 유족의 명단에는 없다. 세상은 그녀의 기억을 잃었지만 그녀의 가슴에 아직도 슬픈 무덤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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