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근 청주시공동주택과 주무관

(동양일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집 똥강아지 두 아들은 배꼽인사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가끔 아이들의 “학교에 왜 가야 해요?”라는 질문에 “학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오면, 넌 더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막연히 답한다. 초·중·고를 마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나는 오늘도 우리 집 똥강아지들을 학교에 보낸다.

첫째 아이가 4학년, 둘째 아이가 2학년이 된 지금, 불현듯 밀려오는 생각이 있다. ‘과연, 우리 아이는 학교에서 행복할까?’ 이런 고뇌 중에 내 학창 시절을 가만히 돌이켜본다. 수업 시간보다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처럼 친구들과 뛰어놀거나 장난질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즐거웠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와 더불어 매점이나 운동장으로 내달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 둥지의 아기 새처럼 간식거리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매점으로 내달리거나 5분이라도 주먹 야구를 하려고 2∼3층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내달린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요즘 학교에는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 머물 수 있는 곳이 없다. 담장의 높이와 그곳에 머무르는 물리적 시간만 다를 뿐 범죄자를 다루는 교도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층층이 쌓여있는 교실(감방)과 좁디좁은 운동장(안마당)! 과연 학교와 교도소가 무엇이 다를까? 건축가 유현준은 그의 저서와 강연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졸업식에는 짜장면 대신 따뜻한 두부 한 모를 사주는 것이 맞다”라고 비꼰다.

유현준은 저서 ‘어디서 살 것인가’를 통해 현재 학교의 그런 공간적인 요소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켜켜이 쌓여있는 높은 층의 학교! 그중에 운동장과 가장 인접한 공간, 즉 1층과 2층은 교장실, 교무실, 행정실, 학습준비실 등으로 상당수를 교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아이들의 공간은 높이 올라간다.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더 멀리 자리하게 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을 보게 돼 씁쓸하다. 공 한 번 차 보겠다고 4~5층 교실에서 운동장까지 계단을 내달리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건의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행복과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학교는 크게 두 분류의 아이들이 지배하는 곳이다. 교실로 불리는 학습의 공간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지배하는 공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은 운동(특히 축구)을 잘하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럼 우리 아이들처럼 평범한 친구들은 어디에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까?

유현준은 학교의 최상층 계단참(계단 도중에 둔 넓은 평탄한 부분, 피난․휴식·진행방향 변경 등의 구실을 함)을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으로 손꼽았다. 그곳에서 친구와 밥을 먹고, 밀린 숙제를 하며, 담소를 나눴던 기억! 지금 어른들은 그런 곳을 어둠의 공간으로 치부하고 학생의 접근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공간은 아이 스스로 찾게 두고, 어른들은 그곳이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조력자 역할로 충분한 것이다. 그가 강연에서 “학교에서 저는 어디로 가나요?”라는 초등학생 아이의 질문에 “그건 네가 찾아야지!”라고 답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하다.

19세기 건물에서 20세기 선생님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교가 단기간에 바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른들이 이런 점을 직시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면,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좀 더 나은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 똥강아지들은 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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