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과 저항의 시대Ⅱ -2기 2국면-

●동질·동등한 교육

동질의 교육이란,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로 일본의 교과서를 사용하여 일본인 학생과 똑같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으로서 교육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일본학교를 졸업한 재일동포는 일본인과 동등한 학력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상급학교에 시험 볼 길이 열려 국적조항에 의해 배제되는 여러 자격(뒤에 서술)을 제외하고는 응시할 수 있다.

동등한 교육이란 일본인 학생과 마찬가지로 제도적·물적 보장을 해주는 것이다. 입학통지서를 보내고 교과서를 무상으로 분배하고 취학원조비를 지급하는 등, 일본인 학생과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공립학교에 취학하면 학교도 가깝고 만약 전차통학을 하게 되더라도 통학정기권을 사용할 수 있다. 수업료는 무상이고, 급식비와 수학여행비 등의 경비를 내기는 해도 학부모가 부담하는 학비는 민족학교에 비하면 턱없이 싸다.

더욱이 문부차관통달은 ‘일본인 자녀와 같이 취급한다’고 말해도 동화교육을 행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일동포 아이들이 이러한 동질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동화교육을 받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실질적으로는 동화교육의 계속인 것이다.



●외국인학교법안의 제정 구상

세 번째는 ‘외국인학교법안’의 제정 구상이다, 문부차관통달은 이 법안에 대하여 ‘새로운 제도를 검토하여 외국인학교를 통일적으로 취급하고 싶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외국인학교로는 재일동포의 민족학교 150개를 최고로 해서 중국인학교, 미국인학교 등 200여 개가 설립되어 있었지만, 일본정부는 이들 학교에 대해 어떤 교육방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각종학교 자격을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 자격이 외국인학교를 원조하거나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대로이다.

그런데 이번 민족학교 처우문제를 계기로 해서 외국인학교라는 새로운 학교 범주를 설정하고, 이것을 일본 학교제도의 일환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교육정책이었다.

문제는 정책의 내용이다. 즉, 이 정책이 외국인학교를 원조하는 보장법인지 단속하는 관리법인지가 문제이다. 1966년 4월에 확실히 드러난 ‘외국인학교제도법안요강’을 보면 그 목적이 관리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안은 모든 외국인학교가 문부대신의 감독 아래 놓인다는 것을 규정하였다. 학교 설립에 대한 인가권은 물론이고, 교사의 임면이나 교과서, 학칙을 신고하도록 하고 수업내용을 보고하도록 하여 일본정부에 불리한 수업내용이라고 판단되면 학교 폐쇄를 명령할 수 있었다. 요컨대 문부대신이 외국인학교의 생사를 장악한 것이다. 반면 외국인학교의 경비는 설치자가 부담한다고 결정하여 문부성은 원조금을 내지 않는다.

이 요강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일본정부는 외국인학교에 대하여 참견은 하겠지만, 지원(예산 등)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외국인학교 교육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조성한다는 정신은 없다.

이 법안은 명확히 재일동포 민족학교를 규제하는 법안에 이의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인으로서의 일본정부에 항의 활동

이상과 같은 문부차관통달에 대하여 재일동포는 한국적, 조선적의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부정하는 정책이라고 파악하고 항의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이것을 시대에 역행하는 식민지교육정책의 재현으로 파악하고,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을 존중하는 우호적인 교육정책을 취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우리들은 그것이 과거 식민지교육을 행한 역사를 가진 자의 반성 행위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재일동포와 연대하면서도 우리는 일본인으로서 독자적으로 항의활동을 조직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1966년 7월에 ‘민족교육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는 문부차관통달이 나오기 5개월 전의 일인데, 그 시점에서 당시 여당의 논의나 문부대신의 발언 등을 통해 통달에 제시된 방침의 기본을 미루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심포지엄의 기록을 <민족교육 - 그 경과와 전망>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정리하여(1965년 11월) 각지의 학습회 자료로 이용하고 그 계발에 힘썼다.

같은 해 12월에는 다니가와 테츠조(谷川徹三) 등 당시의 대표적인 지식인을 대표위원으로 하여 ‘일조민족교육문제협의회’를 결성하였다. 협의회는 문부차관통달에 항의하는 일본인의 전국적인 운동조직의 역할을 맡았다. 이것이 2국면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우리의 주장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문부차관통달을 비판하고 우리의 주장을 대치시켰다. 첫째, 민족학교를 외국인학교로서 위치시킨 것은 합당하지만, 민족학교를 학교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한 정책은 민족학교를 폐쇄한 탄압정책의 흐름을 잇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정책이다.

이러한 방침을 철회하고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의 권리를 당연한 권리로서 존중하고, 민족학교를 학교로서 인정하여 사립학교와 동등한 보장을 해 줘야 한다. 말하자면 이질적인 교육의 존중과 동질한 조건의 보장이다. 이것이 동화교육을 장기간 실시해 온 일본정부가 취해야 할 길이다. 둘째, 일본학교에 취학을 희망하는 재일동포 아이들에 대해서는 취학을 강제하고, 달리 선택할 길을 막아온 지금까지의 경위에 입각해 보건데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이다.

이때 일본인 학생과 동등한 교육조건을 보장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교육 내용에서는 동질의 교육을 실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교육을 실시하면 완전한 동화교육에 빠지게 된다. 일본인 교사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생활을 알 수 있는 수업을 적극 도입하여 재일동포 아이들에게 조선인으로 가슴을 펴고 살아가도록 권장함과 동시에 일본인 아이들에게 조선을 알게 하고 우호의 정신을 기르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재일동포 아이들이 민족학교에서 공부할 생각이 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시 이것을 ‘민족학교의 문 앞까지 데려가자’라고 슬로건 화시켰다.

셋째, 외국인학교법안에 대해 정부는 간섭은 하되 경제적 지원(예산)은 하지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문부성의 관리 아래 두고자 하는데, 이는 한일우호와 국제우호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 대신 간섭은 않지만 예산지원은 한다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어 각각의 교육의 자주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외국인학교에 대해 일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고 대학이나 대학원에 입학할 자격 등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사립학교와 동등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여기서도 이질적인 교육(각각의 민족교육)의 존중과 동등한 조건의 보장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이 국제우호의 정신에 기초한 교육의 사고방식이다.



●조선을 아는 학습운동의 전개

우리는 각지에서 학습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여러 단체나 연구회에 참석하여 이 문제에 대해 인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져 확산된 우리의 운동은 다음 3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이 운동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이 나서서 호소하고, 전국 각지의 지식인·교사·시민이 참가하였다. 정치권력이 민족교육에 대하여 가하는 억압에 대항하여 지적·문화적인 힘으로 민족교육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재일동포의 역사와 교육을 알고, 민족교육에 관련한 사고를 공감하는 데 있었다. 또한 그 바탕이 되는 조선의 역사와 교육을 아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을 아는 문화운동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일본정부에 의한 재일조선인 정책,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자녀에게 동화교육을 강제한 역사와 실태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근대 일본의 식민지 지배, 거기에 있어서 동화교육의 강제를 아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우리의 운동은 이 같은 학습을 기초로 하여 비로소 성립되었다. 재일조선인과 조선인의 생활과 교육을 아는 것, 아울러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동화교육의 강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문화개혁운동이었다.

또 하나는 교사를 중심으로 하여 교육운동을 조직한 것이었다. 이는 ‘일조교육연구집회’로서 결실을 맺어 각지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나아가 도쿄에서 전국 집회를 열었다. ‘가르칠 것인가’하는 내용이었다. 사회과 교수가 중심이 되어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재를 만들고 가르치고 학생의 반응을 조사하였다. 이런 것들을 집회에 보고하고 강론하였다.

또한 교과서에 기록된 조선에 대한 부분을 검토하고, 그것이 일본제국주의 자의 시점에서 묘사된 것이므로 새로운 조선사 부교재를 만들었다.

많은 교사가 조선을 알고 가르치는 이러한 교육활동에 참가하고, 이 주제를 갖고 연구집회를 개최한 것은 일본 교직원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셋째는 일본인 학생과 민족학교의 조선인 학생 사이에 왕성해진 교류이다. 그 전까지는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벽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특히 일본인 학생이 민족학교를 방문하고, 한글 게시판을 보고 재일조선인 교사와 학생이 조선어 교과서를 사용하며 조선어로 얘기를 나누는 조선 교육의 세계에 접한 것은 대단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우애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을 아는’ 학습운동을 통하여 우리는 식민지 시대의 민족 차별에서 벗어나 자기비판을 행하고 조선에 우호의식을 갖는 새로운 일본인으로 거듭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문부차관통달을 보면, 통달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시대의 의식을 답습한 일본인의 케케묵은 발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것을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부차관통달과 그에 대한 비판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억압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의 싸움임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묵은 의식을 가진 일본인 층과 새로운 의식을 형성한 일본인 층 사이의 사상 투쟁이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근본 법규

우리는 재일조선인과 협력하여 민족학교를 지키는 운동에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국회의원을 끌어들이고, 그 힘으로 국회에 상정된 외국인학교 법안을 부결시켜 법률화를 막았다.

그러나 문부차관통달은 행정 차원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 철회시킬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통달은 삼십 수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근본 법규로서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다. 문부성은 관리가 계속 교체되면서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을 들고 나와 대책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우리는 이번 민족학교 졸업생에 대하여 국립대학에 입학시험을 볼 자격을 인정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문부성은 차관통달을 근거로 해서 국립대학에 수험자격을 인정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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