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부터 전국 최초 민‧관 합동 독립운동까지

(동양일보 홍여선 기자) 당진의 항일운동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주목받고 있다.

1894년 10월 지금의 서산시 운산면 내포지역에 동학농민군 1만5000여 명이 집결하고 일부 동학농민군은 승전목에 500여 명을 매복, 다음날 면천에서 출발한 일본군 소위 아키마쓰가 이끄는 90여 명의 일본군이 이곳을 지날 때 기습공격을 감행해 승리를 거둔 지역이다.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와 구룡동 일원에 걸쳐 있는 승전목은 이배산과 남쪽의 응산 사이에 S자 모양의 좁은 협곡으로 당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 사이에 가파른 계곡이 있어 병력이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였다.

1900년대로 넘어오면서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석문면 난지섬이 의병항쟁의 중심에 섰으며 1908년 3월 15일 처절한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났던 이곳의 의병활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눠진다.

1906년 당시 면천 출신인 최구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면천성을 공격했던 사건과 1907년 정미조약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이후 홍원식 의병장이 활약했던 시기로 구분된다.

1908년 3월 15일 당진지역 의병운동의 근거지를 소난지도로 판단한 홍성 경찰분서가 이곳에 기습공격을 감행했으며 이들에 맞서 싸운 홍원식 의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41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행방불명된 곳으로 현재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의병총(등록문화재 제629호)이 조성돼 있다.

동학농민운동군과 의병들의 호국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1919년 3월 10일 당진시 면천면에 위치한 면천보통공립학교에서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충남도내 최초로 학생주도의 만세운동이 일어나 당시 16세였던 면천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 학생이 3.1운동을 목격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동급생 박창신과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과 함께 면천면 동문 밖 저수지부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면천보통학교 교문까지 행진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원용은, 박창신 학생은 공주 형무소에 수감돼 4개 월 간 옥고를 치렀으며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당시 조선왕조 상징적 의미가 담긴 면천읍성 객사를 허물고 면천보통학교를 지었으나 오히려 이곳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졌으며 현재는 당진시가 학교를 이전하고 객사복원이 진행 중이다.

또한 면천보통학교 3.10만세 운동은 한달 뒤인 4월 4일 대호지면에서 시작,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이어진 독립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받아 4.4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천의장터에서 격전을 벌인 당진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만세운동 이었다. 면천보통학교 3.10만세 운동 외에 남주원, 이두하, 남계창, 남상직, 남상락 등이 3.1운동에 참가하고 난 뒤에 당진에서도 독립운동할 것을 다짐하며 귀향한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4.4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높은 평가는 당진지역 최대 만세운동이라는 점 외에도 당시 대호지면장이었던 이인정과 면사무소 직원 민재봉, 송재만, 지역유지였던 남주원 등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전국 최초의 민관 합동 항일운동을 벌여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같이 당진에서는 동학농민운동부터 3.10만세운동, 4.4독립만세운동이 이어져 현재에는 재현행사가 기념사업회 중심으로 해마다 열리면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당진 홍여선 기자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