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반영섭 인성교육칼럼니스트

 

(동양일보) 작년 봄에 섬진강변을 따라 화개장터와 최 참판 댁을 둘러보고 구례의 소문난 고택 운조루를 들러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섬진강과 어우러진 벚꽃 길과 화개장터의 북적거리는 흥겨움, 그리고 최 참판 댁의 멋스러운 고택과 박경리의 소설 토지가 떠오르나 운조루의 ‘타인능해’라는 쌀뒤주의 교훈은 잊을 수가 없다. ‘타인능해(他人能解)’는 전남 구례에 있는 운조루의 쌀뒤주 마개에 새겨진 글자이다. 아무나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사랑채 옆 부엌에 놓아두고 끼니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쌀을 퍼 줄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슬그머니 퍼갈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조선 영조때 무관이었던 류이주가 1776년 이 마을에 터를 잡고 대저택을 지었다. 그는 그의 집을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절구를 따서 운조루(雲鳥樓)라 했다. 운조루의 뜻은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새(鳥)는 지치면 돌아올 줄 아는 구나.’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려는 생각, 즉 진(進)이 아닌 귀(歸)의 철학이다. 귀는 다름 아닌 사람본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웃과 관계를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상생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함축돼 있는 것이 바로 타인능해라는 뒤주이다. 누구나 열 수 있고 항상 열려있다는 의미이다. 적극적 배려, 나눔이다. 이런 행위를 요즈음 말로하면 다함께 사는 정신, 봉사정신, 보시(報施)정신, 노블레스오블리제 (Noblesse Oblige)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자손을 위해서라도 이웃에 덕을 베풀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 덕이 자손에게까지 미치도록 했던 것이다. 재산은 없어질 수 있어도 사람은 남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누면 돌아온다는 생각 그게 운조루의 정신이다. 조선시대 양반부자집 운조루가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230여 년 간 불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쌀뒤주에 있다.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일대의 부자와 양반들은 목숨과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가 힘들었었다고 한다. 다른 부잣집들은 집이 불타고, 총에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지만 류 씨 집안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없고, 운조루가 불타는 일도 없었다. 운조루가 전쟁 중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능해’란 운조루의 철학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버리고 비우면 살아난다는 자연법칙을 류 씨 집안은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운조루의 쌀통을 믿고 게으름만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가능하면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정신은 운조루 주인 류이주가 실천하고자 했던 나눔 실천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타인능해철학은 자비는 무적이란 말을 떠오르게 한다. 돈이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쓰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돈은 최상의 종이고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했다. 이는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서 잘 쓰면 최고의 종이 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 잘 못쓰면 최악의 주인이 되어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는 경고이다. 불법으로 번 돈을 5만 원권 돈뭉치로 110억 원이나 마늘밭에 파묻어 숨기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가짜회사를 만들어 4,700여억 원의 세금을 탈세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늘 밭에 돈을 숨긴 사람은 단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철창신세를 지고 있으니 돈의 최악의 노예가 된 것이다. 반면에 정 반대로 전국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끼니를 굶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백포대의 쌀을 기부를 하거나, 거액의 돈뭉치를 동사무소나 공공기관에 놓고 가는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은 돈을 그들의 종으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툭하면 지도층인사들의 각종비리와 일탈로 시끄럽다. 대다수 국민들은 퍽퍽한 민생의 현실을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는데 그들은 안하무인이다. 타인능해라는 나눔철학의 가르침은 우선 사회지도층들이 솔선수범하여 실천하여야한다. 그래야 공정한 사회, 소통으로 아름다운 사회,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타인능해의 교훈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솔선수범, 자기절제, 희생정신 등의 기본덕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누구나 내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능해의 나눔정신은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의 영원한 윤활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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