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 교장

 

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한 나라가 창업되어 자리를 잡기까지 대개 3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맨 처음 공신들의 도움으로 창업군주가 나라를 여는 과정이 있고, 그 다음 그들에게 나뉘어져 있던 권력을 왕에 복속시킴으로 왕권을 안정시키는 수성군주(守成君主)의 역할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공고해진 왕권을 이용하여 나라의 법과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키는 중흥군주의 시대가 있다. 고려창업과정에서 초기의 불안정을 타개하고 왕권을 공고히 했던 임금은 4대 광종(光宗)이다. 그는 수성군주로서의 책임을 막중히 받아들였다.

그가 등극했을 때 5대10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중국에서는 통일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951년 곽위(郭威)가 개봉에 후주(後周)를 세워서 기운을 돋우고 2대 황제인 세종이 대륙의 통일을 밀어붙이자 그는 그 힘을 자신의 왕권강화에 이용하고자 했다. 그들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후주 중심의 세계관에 고려가 편입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세종은 광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했다. 책봉사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쌍기(雙冀)가 왔을 때 광종은 그의 관직이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신일행의 귀국행렬에 쌍기가 와병을 이유로 합류하지 못하자 광종은 후주에 요청하여 그를 고려에 정착케 하고 원보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에 임명한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강행으로 개국공신들과의 줄다리기에 자신감을 얻은 광종은 가문이 아닌 학문의 깊이로 관리를 제수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958년 음력 3월 스무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함으로써 고려에 문치주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과거제는 역사를 통해 고려 왕권안정의 긍정적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약 600년 후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처세장(處世章)을 통해 시대적 흐름의 왜곡에 과거제도의 이름을 버젓이 올렸다. 벼슬을 구하는 것은 세상적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과거에의 응시가 관직에 대한 욕심의 표현으로 그 의미를 확정하자, 과거라는 시험제도는 학문의 깊이를 재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잃고 오직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의 수단으로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본질과 그 형식이 존재의 당위성을 서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과거제도가 가장 합법적인 관직습득수단이란 것이 명백해 지자 그것은 바로 붕당과 세도정치를 재촉했고 결국 그것이 조선의 운명을 거머쥐었다. 1894년 5월 15일에 치룬 마지막 시험을 뒤로하고 과거제도는 드디어 1차 갑오개혁의 칼날에 그 형식적 종말을 맡겼다. 그러나 그 왜곡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고, 수치스런 일제의 말발굽에 민족이 밟히고, 공화국의 고통스런 탄생과 민족의 분단을 겪고도, 왜곡된 과거제의 망령은 계속 살아남아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서 인격을 아직도 적출(摘出)해 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학문의 내면적 그리고 본래적 의미를 잃고 형해화(形骸化)된 지 이미 오래다.

교육제도가 제도 자체를 위해 존재하게 되면 그 본질적 내용에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계급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된 제도에 편입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으로 오인한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그 일에 몰입하는 동안 누구나 아는 형식적 정보에 인생의 본질을 대비시킨 사회적 약자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인생의 본질을 좇아 철저히 자신들을 외부화 할 제도를 추구한다. 교육의 본질이 아닌 제도로써 교육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 '더 좋은 교육'은 더 비싼 학원 더 비싼 과외를 의미한다. 나라의 운명을 갉아먹는 제도를 위해 돈과 기회의 평등을 부르짖는 방법만이 제시된 사회에서 왜곡된 구조를 진리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일반국민들은 스스로의 확신으로 왜곡된 교육시장에서 주된 소비자가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61년 전 오늘 고려광종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거제를 실시했다. 광종의 시도가 조선 후기의 과거제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제도 자체가 달라서가 아니다. 광종의 그것은 학문자체의 깊이를 재는 수단으로 시행된 반면 조선의 그것은 벼슬에 대한 욕심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시행과 평가를 포함한 교육제도 전체에 대해 본질로의 회귀를 논해야 한다. 이젠 정말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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