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동양일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할 때를 누구나 한 두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가 몇 시간이 몇 분 또는 몇 초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이 처럼 무아지경(無我之境)이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두했을 때의 의식 상태를 몰입(沒入)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거나, 긴박한 스포츠 경기에 푹 빠져 있을 때를 상상해 보라. 몰입은 즐겁고 황홀한 경험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매일 몰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몰입이 주는 이러한 행복을 평생 연구한 칙센트미하이는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몰입의 즐거움 Finding Flow』(1990)에서 ‘사람은 몰입을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고 창의적이 된다’고 하였다. 몰입의 대가인 서울대 황농문 교수는 『인생을 바꾸는 자기혁명, 물입』(2007)에서 몰입이 개인의 천재성을 일깨워주는 열쇠라며 최고의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몰입하라고 주문한다.

몰입이 주는 이러한 행복과 창의성을 비즈니스 리더들이 놓칠 리가 없다. 그들은 개인의 몰입과 조직의 목표를 일치시켜 조직성과를 극대화하려 한다. 그 시도가 동기부여이론이다. 조직의 목표를 내면화하여 마치 자신의 일처럼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직장에 몰입할 수 없으면 회사의 업무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 된다. 반면에 직장에서 몰입할 수 있으면 직업은 고달픈 생계수단이 아니라 천직(天職)이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몰입은 축복(祝福)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특정 분야에 집중함으로써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자나 지식인은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몰입할 때에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연구자에게 ‘한 우물을 파라’는 격언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과학적 탐구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제어하기 힘든 갈구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개인적 차원에서 축복인 몰입이 사회적 관계 차원에서는 어떨까. 사회관계에서의 몰입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두고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 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데 사랑이 지나쳐 집착에 이르게 되면 스토커가 된다. 특히 진영논리가 강한 정치세계에서 몰입의 폐해는 극에 달한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유리한 정보와 지식만을 편취하여 자신의 입장에만 몰입하기 때문이다. 정책토론에서 토론자들 간에 평행선을 달리는 언쟁으로 시작하여 언쟁으로 끝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개별 집단에 대한 충성, 몰입이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사태가 그렇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개인적 차원에서 창의성의 원천인 몰입이 왜 사회적 관계 차원에서는 재앙이 될까. 몰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몰입은 태생적으로 ‘터널 비전(Tunnel Vision)' 효과와 유사하다. 자동차를 타고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가리켜 터널 비전이라 한다. 몰입은 터널 비전과 유사하여 어떤 일에 열중하면 특정 사물이나 목적에 외골수로 집착하게 하는 특성을 보인다. 특히 사회적 갈등이 치열할수록 사용하는 렌즈가 협소해져 이른바 터널 비전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논리가 부분적으로 성립해도 전체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구성(構成)의 오류(誤謬)’가 여기에도 유용함을 확인할 수 있다. 축구 경기 관람석에서 축구 경기를 잘 보기 위해 나 혼자 일어서면 경기를 더 잘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이 일어서면 결국 모두가 앉아 있을 때만 못하게 되듯이 말이다. 개인 차원에서의 몰입이 창의성을 발휘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갈등의 원천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각자가 사용하고 있는 렌즈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자기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더 나아가 각자의 렌즈를 버리고 맨 눈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교묘한 정치적 술수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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