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혜 청주시흥덕구민원지적과 주무관

(동양일보) “TV는 너무 많이 보면 바보가 돼. 너 바보 되고 싶은 거 아니지?”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내가 한 일침이다. 올해 아홉 살이 된 아이는 이런 표현에 충격을 받고 냉큼 TV 코드를 뽑아버린다. 그래도 중독이란 무서운 것이다. 내 눈치를 봐가며 자제를 하던 아이는 엄마가 회사에서 일하는 틈을 타 도둑고양이처럼 몰래몰래 TV를 켜고 만화를 보기도 한다. 가끔은 아빠와 리모컨을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결국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항복의 표시로 리모컨을 건넨다. 어쩌다가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TV 끄라고 잔소리하는 ‘대마왕’이 없어서 신난다며 집에 돌아가려 하질 않는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우리 가족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만들었다. 아빠가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휴대폰 그만 봐!’, 엄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TV 그만 봐!’라고 써서 가족 소개를 했다는 말에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나도 변명을 하고 싶었다. 엄마는 그런 말보다 ‘우리 딸 사랑해’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과는 달리 항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스마트폰과 TV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보지 말라고 하는 건, 아이를 초콜릿과 사탕으로 가득 찬 방에 두고 하나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자녀를 어느 정도 키운 주변 엄마들은 한결같은 조언을 한다. “애들 어릴 때 TV 보여주지 말고 책을 많이 읽어줘!”

평소 나는 일주일에 한두 권씩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근처 도서관에 없으면 먼 거리를 달려 다른 도서관에 가서 빌려올 정도로 열정적인 편이다. 퇴근 후에 집안일을 끝내면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고, 주말에 아이들과 박물관 등에 가면 구석진 자리 찾아 책 읽기 바쁘다. 그래서 내 외출 가방에는 항상 두꺼운 책 한 권과 독서노트가 있다. 하지만 나의 독서 열정은 전염성이 약한지 아이들의 손은 쉽사리 책장으로 뻗지 못한다.

그러다 아이들을 억지로 도서관에 끌고 가서 책을 빌리게 하고, 자기 전 30분씩 책을 읽어주는 등의 노력을 꾸준히 하자 아이들은 티끌만큼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는 점차 선명하게 드러났다. 요즘은 TV가 꺼진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온 큰아이가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가끔은 내가 책 읽어줄 때 쓰는 말투나 의성어 등을 흉내 내며 재미있게 읽는다.

이제는 도서관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아동자료실로 향하는 우리 아이들이 TV나 스마트폰 같은 바보상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책에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걱거리는 종이의 질감을 즐기길 바라고, 책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움직이는 모습이나 화려한 바다 궁전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봤으면 한다.

이다음에 둘째 아이가 학교에 가서 우리 가족 소개장을 만들게 된다면 엄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책 좀 그만 봐!’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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